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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저모/GJH

숨, 뇌, 심장




권재형X주석재
숨, 뇌, 심장














목차


01. 파도
02. 숨
03. 향
04. 방아쇠
05. 죄
06. 뒤틀림
07. 기이함
08. 처음
09. 바다
10. 과호흡
11. 공백
12. 삶
01. 파도







권재형이 언제부터 이렇게 살게 되었나. 야쿠자인 어머니 밑 들어가기 싫어 아버지 따라갔을 때부터였나. 보수적인 아버지한테 반항하며 집을 나왔을 때부터였나. 어차피 손에 피가 묻을 운명이었다면 바르게 살기 위해 했던 노력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권재형 삶의 방향이 뜻대로 설정된 건 아니었지만 어느 시점부터 뒤틀어졌는지 가늠하는, 부질없는 짓을 하곤 했다. 사람이 그래도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고 싶잖아.

권재형의 아버지는 훈민정음도 히라가나도, 무엇 하나 떼지못한 권재형 손 잡고 엄마가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물음 던졌다. 아기 권재형, 딸기 사탕 입에 물고 서툰 일본어와 섞인 한국어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권재형이 잠든 밤이면 언쟁이 커졌다. 이런 여자랑은 살지 못하겠다. 애 교육상 좋지 않다.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거냐,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이래서 제대로된 양육은 할 수 있겠냐고 친권을 주장하며 한참을 싸웠다. 하룻밤 실수에 가져진 애 책임지겠다며 아빠가 몰아붙인 결혼에 애는 바르게 키워야 하지 않겠냐며 짐 싸 들고 일본 떠나 한국온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권재형은 그렇게 대한민국 제영시에서 의무교육을 다했다.

중학교 졸업하고 꾸역꾸역 보내진 고등학교. 사람은 배워야 해, 공부를 해야 해. 라는 아버지의 훈수에 비웃으며 밖을 나돌다가도 타인의 피가 묻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곤 양아치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 주머니 손 찔러넣는다. 걸음마를 막 떼었을 때 마당을 아장아장 걷고있던 권재형은 대문이 열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마가 들어오기에 권재형 활짝 웃으며 달려가니 엄마의 얼굴엔 피가 묻어있었다. 권재형 눈 깜빡이며 바라보다 엄마, 피... 하며 운을 떼니 내 피 아니니까 괜찮아. 하며 곱게 웃어주었던가. 봄이었고, 마당에 쏫아있는 벚꽃나무에 벚꽃잎이 아득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방황다운 방황도 하지 못해 갈 곳 잃어 헤매던 길을 위에서 권재형은 무슨 생각을 했나. 괜한 죄의식만 있어서는. 악인도 선인도 아닌 권재형. 고등학생 주제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담배 입에 물곤 라이터를 켠다. 긴 숨을 내뱉는다. 집에 돌아왔을 때 회초리를 들고 있던 아버지가 권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복도식 아파트 거실에는 고통찬 신음소리와 짝, 짝. 마찰되는 회초리소리만이 울렸다. 종아리에 그어진 선명한 혈선. 사랑하기에 올바른 교육을 위해, 자신도 이러고 싶지 않다며 쓰라린 상처 위 연고 발라주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과 목소리. 어렸던 권재형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니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귀에 막히도록 들으면서 자라나는 권재형이 한 생각은 그러면 둘이 왜 결혼을 한거지였다. 억지로 다니던 학교에서 결혼은 사랑의 결과고 너희는 사랑의 결실이다는 말을 들었다. 초등학교는 단란한 가정을 배웠고 중학교에 올라와선 이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배웠다. 엄마, 아빠. 자식. 그 외 기타 등등의 가족.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사는 게 가족이라고.

사랑이 뭐라고, 사랑 없는 연애, 사랑 없는 결혼. 육체적인 관계만이 사랑인가. 알 길이 없었다. 사귀자. 라는 한마디만 있으면 연애가 되는 건가. 사랑한다는 한마디면 사랑인건가. 권재형 앞에서 울먹이던, 소꿉놀이에 가까웠던 전애인들이 떠올랐다. 무책임하게 굴지 마라는 원망어린 목소리에 권재형은 책임이라는 단어가 우스워 웃었고 그런식으로 살지마라는 먹지 않을 수도 있었을 욕까지 먹었다. 권재형의 삶은 책임이라는 한 단어에 얽매어 이런 양상을 띄게 되었는데. 삶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책임질때만 유지가 된다는 점이 가혹하다. 사람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을 때 어른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권재형, 엄마, 아빠의 책임의 결과를 떠올리며 책임의 기준은 다 다르지 않나. 하고 비관적인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빠는 엄마를 증오했다. 누구보다도 엄마를 닮은 권재형을 바라보는 눈빛은 사랑스롭고 하나뿐인 딸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니 알만했다. 아버지는 권재형과 눈을 마주쳐 주지 않았고 꾸지람은 아버자의 가르침이라 토달지 않고 들어야했다. 권재형은 결국 고등학교 자퇴서를 제출하고 가출했다. 집에서 집으로.

일본으로 갔을 때 권재형 무릎을 꿇고 일본도가 걸린 방에 앉아 엄마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살면서 그렇게 호탕한 웃음소리는 처음 들었다. 애니메이션에서 인위적으로 삽입한듯한 경쾌함이었다. 시원하게 내리치는 파도와 같았다. 너도 결국은 우리 집안이라는 소리였다. 뭐, 한 번 집 나간 자식 다시 거둬줄 순 없지만, 지사를 내려주겠다 했나. 결국은 그래서, 한국에서. 권재형. 일본 한, 큰 일본 야쿠자 지지를 받으며 조직을 세웠다. 열일곱에 보스가 된 권재형. 등 뒤로 집에서 데려온 야쿠자들 병풍처럼 세워놓고 세력을 세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권재형이 병풍이자 꼭두각시겠고, 엄마의 감시를 평생 벗어날 수 없다는 소리겠지만 더 이상 권재형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권재형에게 사랑이나 책임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도 없었다.

권재형은 가끔 일곱 살의 봄을 떠올린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계절 집 앞마당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서 유카타를 든 어머니는 권재형 돌아보며 말했다.

“재형아, 손에 한 번 묻은 피는 지울 수 없어”

권재형 손에 가문 한자 새겨진 작은 칼 쥐여주던 손길은 왜 따뜻했을까. 아직도 가끔 궁금해. 잊고 싶은, 지옥 같은 기억이라면 평생을 욕하며 살아갈 텐데. 그날의 날씨가 맑아서, 분홍빛 벚꽃이 예뻐서, 엄마의 손이 따뜻해서. 권재형은 인생을 저주할 수가 없어. 시궁창 인생. 더럽게 산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지. 가끔 폴더폰에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익숙한 11자리. 벨소리가 끊기면 입금했다는 아버지의 문자가 뜬다. 그러다 가끔은 밥이나 잘 챙겨먹으라는 걱정어린 문자도 도착한다. 쥐꼬리만한 월급 벌어 살면서도 가부장에 미쳐 자식이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못한다며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오는 아버지. 지긋지긋하다.

엄마-아빠-권재형이 가진 관계란 기이했다. 사랑없는 가족. 그렇다고 형식적이지도 않았다. 서류상으로 보증된 가족관계는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책임만 지며 자기주관적인 사랑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어머니가 아니었고, 남편이 아버지가 아니었으며, 딸이 권재형이 아니었다면 나았을까. 한명이라도, 운명이나, 성격이나, 타이밍이나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셋의 인생이 지금보다는 더 그럴듯한 화목한 가족이 되었을텐데. 비극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셋은. 사랑을 모르고, 자신만 아는 사람들이기에 뒤틀린 가정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날 뿐, 가족의 정이 없어 외로움을 타 삶을 비관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러니 이 셋은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할 수 있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각자, 자신은 최전을 다하고 있다 자기 만족을 하면서.
02. 숨






권재형은 구두 밑으로 흘러가는 피를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에 빠르게 식어가는 고깃덩어리를 바라본다. 그러게 왜 욕심을 부리고 그래. 권재형 머리에 닿았던 총구에 기름이 묻은듯한 불쾌함이 밀려와 무릎 굽혀 시체 셔츠 옷자락으로 총구 끝 닦는다. 눈뜨고 죽어있는 얼굴에 눈을 감겨주고는 굽혔던 무릎 펼쳐 선다. 한동안 피가 흐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검붉은 피가 아스팔트를 적신다. 금이 간 땅 틈새로 자라있는 잡초 위가 피로 불든다. 권재형, 새삼스럽지만 기어이 손에 피를 묻히며 사는구나. 처음 방아쇠를 당겼을 때의 감각이 무뎌졌다. 반사적으로 당겨버린 방아쇠에 빗맞췄다는 안도감. 총알 스친 팔 붙잡으며 권재형에게 겨눠진 총구, 먼저 쏘지 않으면 죽어버릴 상황에서 살고 싶던 권재형은 그렇게, 검지를 당겼다. 얼굴에, 뺨에, 옷에 피가 튀었다. 질기게 따라붙는 여운에, 하얗게 질려 방안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권재형 바라보단 엄마는 가까이 다가와 권재형 뺨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따뜻한 손, 다정한 목소리. 네 피 아니니까 괜찮아. 권재형은 헛웃음을 지었다.

고깃덩어리를 지나 칠흑보다 검은 바다를 바라본다. 증거 인멸하며 태우고 있던 모래사장 드럼통 속 불길에 권재형 검은 장갑 벗어 던졌다.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새까만 하늘 위로 회색 연기가 높게 피어오른다. 쏴아-하며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 하래 한 점 부끄럼 없이, 죄인으로 산다. 죄책감은 없다. 사람은 다 제 모습대로 산다. 죄를 후회하지도, 즐기지도 않았다. 살아지는대로 사는거다. 신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권재형은 망설임 없이 “ㅋㅋ전 지옥에 몇 년 정도 있어야 하나요?” 물을 것이다. 권재형은. 이도 저도 아닌 삶에, 스스로의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하니까. 사는 거다. 자결은 불효라는 가르침에 죽지 못하고. 그렇게. 눈을 뜨니 숨, 멈추지 않아, 쉬어 있어, 그렇게, 오늘도.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거창한 이유같은 건 없다. 성장배경이나 선천적으로 태어난 성격, 기타적인 다른 이유들을 가져다 붙여도 죄는 죄다. 인간사 복잡해 일 파고들어 해석을 갖다 붙이지만 선명하게 뛰는 맥박을 끊어내는 권재형은 가끔, 아무것도 없는 꿈을 꿨다. 말 그대로 무(無). 선도 악도 허황이라는 죄도 없는 곳. 의식도 시간도 없다. 죽음과 가까운 시야에 그 꿈을 꾸고나면, 권재형 찝찝한 기분으로 하루룰 살아간다. 권재형 무의식에 남아있는 조그마한 양심이다. 죄가 있기에 무가 두렵다. 이런 삶의 모양도, 죄도, 구원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숨, 뇌, 심장. 숨이 멈춰 피가 돌지 않아 뇌정지에 심장이 멈추면 사람은 죽는다. 죽음과 비슷한 삶. 권재형. 다 부질없다. 죄에 대한 감각도 무뎌져서 그저 살아갈 뿐인 권재형.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직면하기. 공포따윈 모르는 척 눈 감은채 방파재에 밀려오는 파도에 깎여나가도 티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버티기. 고결하고 긍지 높은 넌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바보 같은 주석재. 멍청한 새끼. 권재형의 결핍은 정반대의 삶, 주석재를 향했다. 권재형은 총구 휘휘 돌린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어린 나이에 순경이 되어서 나를 캔다지. 바보 같은 새끼야. 내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권력도, 짬도 없는 새끼가 뭘 한다고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나.

연례행사이기는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선배들은 왜 이런 큰 건을 모르는 척 사시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열정뿐이라 권재형 잡아보겠다고 길길히 날뛰는 게. 그러면 권재형 적당히 어울려주다 겁 좀 주고 아는 경찰들 잡아 협박하고 회유하면 경찰쪽에서 정리했다. 권재형 최대로 오래 따라다니던 신입은 한 달 이었다. 주석재는 얼마나 가려나 봤는데, 오, 이새끼가 기록 세우겠는데. 권재형 킥킥 웃었다.

가끔은 재미있었다. 흥미에 가깝지. 일부러 정보를 흘리고 주석재 손에 잡혀준 권재형, 실실 웃는다. 험악한 표정 지으며 권재형 말에 대답도 안 해주는 남자. 최고로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으면서 웃음을 주는 이 남자.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날씨도 우중충하고, 눈앞에 있는 남자 표정이 하도 험악해서. 권재형 눈썹 축 내리고 주석재 바라봤다. 꼭 비맞은 강아지 꼴이려나. 권재형 하얀 셔츠가 비에 젖어 옷 위로 맨살이 비쳤다. 주석재의 미간이 좁혀진다.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며 젖은 옷은 보지 않으려는 저 남자. 고지식하기도 하지. 권재형은 붉은 입술 시무룩하게 짓이기다 입을 연다.

“나 왜 그렇게 싫어해?”

뜨문뜨문 문장 놓았다. 주석재는 권재형의 목소리에 시선 휙 돌린다. 험악한 말투로 착하게 좀 살아. 하며 권재형 보낸다. 아, 정말 재밌다니까. 권재형 깔깔 웃으며 주석재 어깨에 팔 건다. 주석재 경찰 제복도 젖어 찝찝한 셔츠들이 마찰한다. 권재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석재의 젖은 뒷머리카락 쓰다듬는다. 눈을 마주쳤다. 비가 와서 그런가. 눈동자가 더 깊어보여 속눈썹 한참을 바라본다. 권재형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툭 묻는다.

“너 나랑 키스할래?”
“보내 줄 때 가.”

화 꾹꾹 참는 답이 들려왔다. 어차피 진심으로 키스할 마음도 없었다. 놀리는 거니까. 주석재의 표정, 행동, 말투에 좀 꼴리기는 했지만 앞으로 볼 일도 많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날까. 권재형 주석재는 뺨 쓰다듬고 놓아준다. 권재형 등 뒤로 검은 정장을 입은 수행비서가 운전하는 빨간 스포츠카가 멈추어 선다. 권재형 냉큼 조수석에 타고 석재 향해 손 키스 날린다. 주석재는 얼빠짐에 분노 더한 표정으로 권재형 바라봤다. 권재형은 따끔따끔 닿는 시선에 깔깔 웃으며 안전벨트 맨다. 비 오는 날에 스포츠카, 정말 째진다.

확장할 만큼 세력을 키워놓아 할 일이 적었다. 주석재는 권재형의 단조로운 삶에 나타난 소소한 재미였다. 경찰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샌님 새끼가 한탕 땡겨서 승진해보겠다고 발발대는 줄 알았더니 또 그건 아닌 모양이다. 한 달 하고 일주일이면 제풀에 못 이겨, 쫄아, 그만둘 줄 알았더니 목숨이 간당간당할 뻔한 상황에서도 권재형 잡겠다고 졸졸 따라다녔다. 권재형 잡으면 승진은 물론이고 훈장에 명예까지 드높이겠지만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은 안 캐. 권재형 적당히 꼬리 자르면 그 꼬리들이나 잡아가지. 모종의 알력 관계가 있는 권재형을 누가 잡겠어. 이쯤 되면 사수나 선배가 위험성을 알려줬겠지. 따로 불러서 훈계했겠지 싶어 다시 볼 일 없겠다고 판단하고 안일하게 뒀다.

“너무 많이 캤잖아”

서늘한 권재형의 목소리가 빈 창고에 울린다. 넓은 텅 빈, 먼지 가득한 공간 한 가운데 밧줄에 묶여 권재형을 노려보고 있는 주석재. 권재형은 피식 웃으며 주석재 가까이 다가간다. 권재형은 들고 있던 총 휘휘 돌린다. 주석재 한참을 내려보던 권재형은 주석재의 열렬히 노려보는 시선에 하반신이 뻐근했다. 권재형, 피식 웃으며 돌리던 총구로 주석재 뺨 톡톡 친다.

“이거 빨면 살려줄게.”

적당히 겁 좀 줘서 보내려고 했는데 노려보는 네 표정에 장난기가 돌아서. 권재형 주석재 턱 우악스럽게 잡아, 벌린다. 살짝 열린 입술 틈새 사이로 무식하게 큰 총구 들이민다. 장전되어있을까 봐 불안한 듯 눈빛 흔들리는 주석재는 총구를 입에 머금는다. 입술 틈 사이로 침이 줄줄 흐른다. 눈동자 굴리는 주석재. 권재형은 주석재와 시선 엮어내다 목젖 닿을 만큼 총구 훅 집어넣는다. 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권재형은 킥킥 웃으며 총구 빼낸다.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총 끝이 주석재의 침으로 번들거린다. 창고 천장 조그맣게 켜져 있는 전구에 총 이리저리 둘러 반사된 빛 바라본다. 총 뒤 시야로 네 얼굴이 보였다. 픽 웃으며 더럽네, 중얼거리고선 나른하게 웃는다. 권재형 무릎 굽혀 주석재 셔츠로 총구 닦아낸다. 느리게 두 눈 마주친다. 다음에는 적당히 캐. 다정하게 말하곤 주석재 머리 쓰다듬는다. 권재형은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본다. 슬슬 올 타이밍이지. 짧게 생각하고 주석재 홀로 둔 채 창고를 나온다.

권재형은 검은 세단 조수석에 타곤 반짝이는 도시를 바라본다. 이쯤이면 동료가 픽업해서 안전하게 집까지 모셔다 놨겠지. 범생이 새끼. 권재형 다음날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 안에 주석재 입에 넣었던 총 포장해 집 앞에 배송시켜 놓고는 빙긋 웃는다. 이래서 열정 가득한 신입 짭새들은 재밌다. 너무 겁줬나. 조사만 그만두는 게 아니라 경찰까지 그만두겠네. 이제 다른 신입은 언제 즈음 들어오려나. 한 일주일쯤 지났나, 주석재 여전히 권재형 따라다녔다. 이 새끼 봐라? 쫄지도 않았는지, 아니면 쫄았는데도 지독하게 권력에 눈이 먼 건지. 정말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를 귀여운 새끼.

주석재 같은 애들 귀엽지. 몸도 좋고. 권재형 의자에 앉아 주석재 프로필 읽는다. 정보원은 권재형에게 주석재 인생 10장 남짓 된 자료로 정리해 넘기면서 인생이 얼마나 단조롭고 단순한지 조사할 것도 없었다고 보고해왔다. 권재형 피식 웃으며 프로필 넘긴다. 인문계 고등학교 3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고, 수도권 알아주는 대학에 입학해 장학금 받고 다녔다고. 쉬는 날이면 술도 안 마셔, 놀러도 안 가. 독서실에서 박혀서 공부만 하며 지냈다라 재미없게 살아온 인생과 다르게 주변에 사람은 많았다고, 정말 고지식하네. 권재형 문득 생부를 떠올린다. 고지식, 고지식. 하, 권재형 픽 웃으며 옆에 서 있는 비서실장에게 서류를 넘긴다.

“얘 닮은 애들이나 불러봐.”

권재형 그렇게 한동안 주석재 닮은 애들만 만나왔다. 죄책감은 있었다. 순진해 보이는 낯짝의 아이들이 밑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걸 보고 있자니 양심이 아려오는 게 옅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권재형 어린 시절 새겨진 생부에 대한 혐오감이 성장하며 이어져 온 걸 수도 있겠지만 권재형은 알 길이 없지. 번듯해 보이는, 건전해 보이는 얼굴이 쾌락으로 붉게 물드는 게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어. 권재형 하루 놀고, 하루 버린-버렸다기엔 뒷배 서주며 만족할만한 이별 선물을 줬지만-애들중에 유독 예쁘장한 남자애가 있었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던가. 상업영화에 꽂아줄까 했더니 그건 아니래. 경제적 지원만 해달라나 뭐라나. 연기는 제 노력으로 가고 싶다지. 웃긴 새끼였다. 주석재랑 닮은 꼴, 주석재 다음으로 웃긴 새끼라 가끔 종종 불러서 놀았다. 유일하게 정리하지 않은 장난감.

불러놓으면 권재형 옆에서 아양 떨며 만족시켜놓고는 숨 숙이고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권재형 서류 볼 때면 그 자리에서 가만히 대본을 읽고 있는 모양새에 주석재가 서에서 저러고 있으려나 싶어 웃겼다. 한밑천 잡아보겠다고 독기 가득 가진 채 교태를 부리는 사람들만 보다 얘, 그래, 주석재 닮은 애들 보니 신선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뽀송한 이 애도 잘 키워보면 좋겠다고, 재미없는 주석재는 슬슬 다른 일 하면서 저랑 놀아주지 않을 테니 얘랑 뒹굴자고 생각하니 인생이 그렇게 권태롭지는 않았다. 권재형 손 끌어와 제 뺨에 가져다 대면서 쓰다듬어 달라기에 권재형 웃으며 나비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귀엽네.
03. 향






어느 날 주석재가 찾아왔다. 경찰 그만뒀다나. 갑자기 찾아왔을 때는 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당혹감이 컸다. 나비 불러 입 맞추고 있는데, 갑자기 호출 라인 불 켜지며 전화벨 소리가 울리더니 짭새가 왔단다. 적당히 넘기라 했더니 글쎄, 주석재래. 주석재. 미친 새끼. 번진 립 쓱 닦고 들여보내. 한마디 하며 소화기 놓았다. 권재형 새 담배 꺼내 입에 문다. 나비가 냉큼 라이터 들어 불을 켜주기에 머리 쓱쓱 쓰다듬어 주고 간식이라도 사 먹고 들어가라며 주머니에 용돈 쥐여준 채 보냈다. 권재형 창밖 바라보며 뻐끔뻐끔 연기 내뿜는다. 창밖으로 높은 빌딩 그림자 밑으로 매연 연기 가득한 도로가 보였다. 창문을 열어도 답답한 사무실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주석재가 들어왔다. 퀴퀴하고 꿉꿉하던 회색빛 사무실에 깔끔한 향이 퍼졌다. 순수해 보이려 권재형 만나기 전 빨래 된 옷을 입고 온, 애들한테 나던 섬유유연제 향도 아니고. 권재형 대놓고 꼬시려 머리 아파질 정도로 뿌린 향수 향도 아니고. 피 묻은 옷, 손, 씻지 못해 풍기는 피비린내도 아니고. 지독한 술 냄새도, 담배 향도 아니고. 적당히 뿌려서, 체향과 섞인 그런 깔끔한 향.

권재형이 주석재 보면서 했던말은 그래서? 한마디였다. 경찰 그만둔 거랑 날 찾아온 거랑 무슨 상관인데. 주석재는 그런 권재형 보면서 선물상자 돌려줬다. 무서워서 그만뒀다는 소리 하고는 자연스럽게, 은근하게 만날 데이트 같은 약속을 권유하길래 권재형 피식 웃는다. 모르는 척 어울려줄까. 어디까지 하려나 지켜보자는 심보였다. 주석재 권재형 애인처럼 따라다니면서 애인처럼 구는 꼴이 또 귀엽네. 살면서 거짓말과 제일 안 어울리는 사람, 지갑 속 경찰 공무원증이나 두고 다니면서 그런 소리를 하지. 주석재 계산하던 카드 꺼낸 지갑에서 파란색 카드 언뜻 보이기에 모르는 척 메뉴판 보는 것도 교역이었다.

여자랑은 어울리지 않는 인생을 산 새끼 치고 능숙하게 리드하려고 노력했다. 그야말로 노력이었다. 자세히 보면 어색하고, 뚝딱여서 얘는 앞으로도 스파이는 못 하겠네. 속으로 생각했다. 채광 좋은 카페에 앉아있는 주석재와 권재형. 권재형은 크림 가득 올라간 딸기 프라페 먹으며 어색하게 굳어있는 주석재 입꼬리 꾸욱 눌렀다. 주석재는 갑자기 왜 그러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유를 알려줄 수는 없어 권재형 포크 들어 주석재 입에 케이크 넣었다. 권재형과 주석재는 영화도 봤고, 밥도 먹었고, 카페도 갔으며, 쇼핑도 했다. 산책도 하고, 다른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전부 했다. 물론 주석재가 짜온 코스들이었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권재형을 기다리는 주석재. 권재형은 적당히 멀리서 검은 세단에 앉아 주석재 바라본다. 왼쪽 손목을 들어 시게를 바라봤다. 약속시간보다 20분쯤 지나있었다. 권재형은 창문 밖 주석재를 바라본다. 시계를 바라보다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휴대폰을 만지다 스트레칭도 하고. 권재형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린다. 주석재에게 다가갔다. 주석재는 길던 기다림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배알도 없는 새끼. 권재형, 애인은 두지 않으니 정부들,도 다 비슷하기는 했다. 권재형이 애인을 만들지 않겠다 다짐한 건 아니었다. 단순히 권재형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기에 본질적인 거부감이었다. 정부는 쉬웠다. 돈으로 사랑을 사고 애정을 사고, 정 들기 전에, 인생 지독하게 꼬이기 전에 적당히 치워서 만족할만한 삶을 살게 해준다. 관계가 귀찮아지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하니 그래도, 갑자기 칼 맞지 않게 조심하라는 저주는 듣지 않는 관계들. 지금까지 만났던 애들이 떠올랐지만, 주석재와는 달랐다. 주석재는, 원하는 게 없으니까.

야망이나 성공, 더럽고 추악한 것들. 주석재가 원하는 건 권재형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끔 대가리가 꽃밭인 애들은 정말 사랑만을 원하기도 했지만 비슷한 애 연결해주면 또다시 그쪽에서 세기말의 사랑을 찍으니 권재형 사랑이란 역시 다 부질없지. 생각할 뿐이다. 주석재가 권재형 옆에서 살살 비위 맞추며 달게 구는 거야 뻔했다. 어렵사리 키워온 조직 무너뜨리겠다고 뭐라도 하나 주워가겠단 심보겠지. 초짜였다. 샌님이었고. 권재형은 놀리면 놀리는대로 파르르 떠는 주석재가 참 재밌었다. 권재형과 주석재는 공원을 걷는다. 가로등 세워져 있는 공원은 작은 놀이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권재형, 빨간색, 초록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그네 하나 자리 잡고 앉는다. 발을 움직인다.

흔들거리는 시야로 하늘을 바라봤다. 도시의 밤은 별이 보이지 않는다. 작게 인공위성 하나가 빛난다. 데이트 끝나가는 밤 풀벌레 찌르르 운다. 권재형은 그네 두어 번 타다 내려선 옆에 앉아있는 주석재 앞에 선다. 주황빛 가로등이 얼굴 윤곽 드러낸다. 주석재 놀려주고자 허리 굽혀 시선 맞춘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귀밑으로 흘러내린다. 권재형,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밤 기분 좋은 서늘함에 눈꼬리 휘어 웃으며 속삭인다,

“자기야, 그런데, 데이트의 끝은 호텔 아니야? 왜 항상 산책만 하다 끝내.”

주석재가 권재형 올려다본다. 권재형, 주석재의 답을 원하는 건 아니었어서 허리 핀다,

“혹시, 내가 처음이야? 동정?”
“처음은 아닌데...”

주석재 눈동자 굴린다. 귀엽고, 웃긴 새끼. 연인인 양 구는 주석재. 권재형의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뻣뻣하게 굴면서 호텔 라운지로 들어가는 주석재. 어색한 입꼬리가 우스워, 사랑해. 가볍게 입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고. 데이트로 시간을 보내고. 이렇게 만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는 아예 사무실로 부르기도 했다. 건질 건 없겠지만 주석재가 좋아하길래 가만히 놔뒀다. 서류 보는 권재형 옆에 다가와 무슨 서류냐고 바쁘냐 물어보는 주석재 멱살 잡아 입 맞춘다. 당황했는지 눈동자 커다랗게 뜨며 얼굴 빨개져 갔다. 권재형은 가늘게 뜬 눈동자로 주석재 얼굴 바라봤다. 너도 인생이 기구하다. 그러게 왜 나 같은 거 옆에 있어서 그래. 불쌍하게.

주석재와 보내는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서 문제였다. 섞이는 혀가 달았고 탄탄한 근육으로 눌러오는 체중이 좋았다. 그래서, 불쌍했다. 이렇게 노력해도 무엇하나 얻어가지 못할 텐데. 권재형은 주석재가 좋아서. 은은하게 따뜻한 체온이 익숙해져 가는 감각이 기이했다. 고여 썩어가던 물 같던 권재형 인생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평안을 찾기까지의 시간을 가늠해보다 한숨 작게 쉬었다. 본질적인 거부감. 권재형은 틈틈이, 적당히 선을 그었다,

주석재는 권재형의 그어놓은 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지, 권재형과 이렇게 시시덕거릴, 매달릴 시간에 소소하게 작은 건들 여럿 해결했다면 승진하고도 남았겠다. 왜 이렇게까지. 얘는 정말 날 그렇게까지 잡아넣는데 불을 켤 정도로 날, 싫어하는 건가. 이렇게까지 잡기 위해 날 따라다니는 거면, 이 정도면 정말 사랑인 거 아니야? 권재형 늦은 시간 사무실 의자에 앉아 주석재 실적보고서를 보고는 삐걱삐걱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슬슬 다른 건이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강등될 텐데. 바보 같은 주석재. 멍청한 새끼.

씻고 나온 권재형은 어색하게 앉아있던 주석재 무릎 위에 앉았다. 젖은 머리카락 위에 얹은 수건 주석재에게 기대며 말려줘. 속삭인다. 말이나 좀 흘려줄까. 라이벌인 조직이 이번 부산항에서 불법체류자 신원미상 외국인 노동자를 동원해 인력 충원을 한다더라. 걔네 교육하려면 그래도 이주일은 조용하겠네. 걔넨 조직원들이 정말 소모품인 줄 안다니까. 죽으면 새로 갈고, 갈면 되니까 죽이고. 잔인한 새끼들이지. 주석재 권재형 머리 말려주는 드라이기 소리에 잘 들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흘려듣는 척하면서도 입꼬리 어색한 게 제대로 들은 모양이다.

권재형은 마른 호텔 이불 안으로 들어가 베개에 등을 기대어 주석재 바라봤다. 맨살에 건조한 에어컨 바람이 닿는다. 이젠 내가 떠먹여 주기까지 하네. 네가 원하는 게 돈도, 명예도 아니라서 그러잖아. 주석재가 권재형의 허리를 끌어안아 왔다. 주석재의 체향이 풍긴다. 권재형은 눈을 감는다. 오늘은 피곤했다. 눈 감고 있는 권재형 옆 핸드폰에 전화가 울려왔다. 나비였다. 한동안 방치했더니 만나달라는 연락인가 보다. 그래도 무신경한 게 마음 써 입금은 꼬박꼬박 해줬는데. 권재형 전화를 받는다. 항상 고맙고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겠다는 애교 섞인 목소리다. 귀엽네. 권재형 낮게 웃으며 지금 간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는다. 이럴 때는 머리 굴리는 소리로 시끄러운 주석재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한 목적을 가진 애들이 좋았다.

주석재가 권재형 옷자락 잡아 눈 마주쳐왔다. 가지 마. 주석재의 짧은 목소리. 권재형은 주석재 뺨을 톡톡 친다. 퍽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게 마음이 약해지긴 하네. 그래도 권재형, 언제나 붉은 입꼬리 올려 웃으며 입 맞출 듯 턱 당긴다. 널 농락하듯 눈웃음 지은 눈꼬리 곱게 접어 두 눈 맞췄다.

“너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주석재가 권재형 손 등 위에 손 겹쳐왔다. 권재형이 다른 애들과 연락하고 있으면 눈치 슬 보며 붙어오는 주석재. 권재형은 잔잔하게 웃음기 찬 얼굴로 주석재 바라본다. 주석재는 권재형 눈 맞추며 낮게 애원한다.

“나한테만 집중해주면 안 돼?”

권재형 피식 웃는다. 잡힌 손 엮어 주석재 손 마디마디 겹친다.

“네가 더 재미있게 해줄 거야?”

눈꼬리 살살 휘어 웃으며 주석재 손 등에 입 맞춘다.

“노력할게.”

얼굴 새빨개졌으며 잡은 손 놓지 않는 주석재. 범생이 새끼. 주석재 정보가 담겨있던 서류를 생각한다.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던 열정 과다. 공부만 했다더니 틈틈이 여자 잘 만나고 다닌 거 아니야? 여우 같은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는 말에도 사람 좋은 미소 지으며 할 일을 하는. 재미없는 놈. 놀지도 않아. 유흥도 싫어해. 권재형 삶과 거리가 먼 삶의 주석재. 목표가 고결하기에 흥미가 동했지만, 그것만으론 슬슬 지루하지. 귀엽고 순진하고 뻔해서. 경찰을 그만둔(뒀다고 말한) 주석재는 권재형의 정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권재형 주석재 어깨에 머리 기댄다. 나는 네게 원하는 걸 줄 수가 없는데. 넌 그걸 알까. 손깍지 마다마다 겹쳐 드는 온기. 사귀지도,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노력한다고 말하는 주석재.

“넌 내 뭔데?”
“아무것도 아니니까 불쌍하잖아.”
“석재야, 귀엽긴 한데,”

눈치껏 굴어야지. 작게 속삭인다. 권재형, 주석재와 눈 마주친다. 주석재 표정 바라보다 네 뼘을 톡톡 친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 텔을 나온다. 피곤하다. 도착한 사무실 앞은 나비가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들어가서 기다리면 되는 걸 저렇게, 순수한 척, 예뻐해달라 티를 내는 게 웃겼다. 나비를 끌어안았다. 방금 막 빤 듯 뽀송뽀송한 섬유유연제 향이 풍겼다. 더워지는 여름밤에도 예뻐 보이겠다며 긴팔에 코트 차려입은 꼴 보아하니 웃음이 터졌다. 얼굴 빨개져 은은하게 땀 냄새가 섞여선, 향이 날아가지 않아 폐까지 독하게 스며드는 섬유유연제. 입 맞춰 달라는 소리에 권재형 나비의 턱을 잡았지만 가볍게 뽀뽀만 해주고 말았다. 정갈해 보이는 낯짝을 보니 기분이 들지 않았다.

권재형은 가끔 다른 사람과 숨을 나눴다. 사랑스럽게 웃으며 권재형 비위 맞춰오는 비굴한 인생. 뽀얀 피부 위에 붉은 흔적 남기면 더운 숨 내뱉으며 사랑한다. 내뱉는 예쁘장한 얼굴들. 감흥은 없다. 사랑스럽긴 해도 사랑하지는 않으니까. 사랑처럼 부질없는 게 어디있어. 구두로 약속한 감정이 평생 갈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어리석지. 권재형 거래처 미팅, 다른 조직 보스 앞에 두며 붉은 입꼬리 올려 웃는다. 굴러다니는 모나미 볼펜 들어 사인하곤 악수 손 건넨다. 서류ㅡ 사본까지 인쇄해 정리해놓고 나서야 권재형 휴대폰 들었다. 이름도 저장해놓지 않은 불필요한 연락들 사이로 주석재가 보였다. 주석재와 연락하지 않은 지도 몇 주쯤 되었다. 그날, 텔, 며칠 후에 권재형, 주석재에게 주석재가 업무 보는 사진을 보냈으니 알아서 사리고 있겠지.

주석재에게 보냈던 사진을 꾹 눌렀다. 푸른빛의 셔츠가 잘 어울렸다. 미간 찌푸리며 서류를 보는 표정이 그대로 찍혀있었다. 이때가 권재형과 방에 있던 날 하루 전 사진이니까 주석재, 소름 좀 돋았을 거다. 너 경찰 그만뒀단 말 아무도 안 속았어ㅋㅋ. 귀여운 놈, 표정 한번 보고 싶은데 아쉽네. 권재형은 사무실 검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사무실에서 검지로 책상 톡톡 두드린다. 인생은 하루의 반복. 가끔은 반복되는 삶이 권태로웠다. 문득 꿨던 꿈이 아무것도 없는 날이면 권재형은 숨이 막히는 기분도 들었다. 권재형 흐음, 하는 한숨 길게 뱉고 옛날에 쓰던 폴더폰을 켰다.

띠링, 하며 문자가 왔다. 아버지와 입금내용이었다. 권재형은, 마른세수하고 권재형 싸인 새겨진 서류 카메라 켜 촬영했다. 익숙한 숫자 열 한 글자 입력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옛날 휴대폰은 사진을 전송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권재형 휴대폰 부숴 쓰레기통에 넣는다. 촬영한 서류라 해봤자 위치, 날짜, 시간 정도만 노출이 되어있었지만. 정보 유출. 책임자. 내통. 많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아 피곤한 미간 꾹꾹 누른다. 변덕이었고, 충동이며, 후회도 없었다. 미련없는 삶. 주석재가 굴리는 룰렛의 잭폿일지, 쪽박일지. 권재형 주머니에서 구르던 동전을 튕겼다.
04. 방아쇠






날이 흐리다. 권재형이 신었던 양말에 구멍이 뚫렸다. 뒤늦게 발견한 구멍은 뒤꿈치가 크게 뚫려있었다. 권재형은 양말을 벗어 구두를 신는다. 뒤 발목이 자꾸만 까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기를 밀매하는 선착장은 폭풍 전처럼 고요했다. 곧 비가 떨어질 것 같았다. 새벽부터 심상치 않은 파도에 거래 시간이 미뤄졌다. 일본항에서 지금은 배 못 뜹니다.고 보고해온 탓에 무한대기 중이었다. 2시간쯤 늦춰진 시간에 분위기는 험악했다. 권재형은 실 웃으며 험악하게 서 있는 깡패들을 바라본다.

“눈깔 좀 펴, 우리는 브로커밖에 못되니까.”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4시 20분이었다. 10분만 있으면 배가 정박할 거다. 출항했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무사히 도착할 테지. 저 멀리서 뱃머리가 조그맣게 보였다. 등대의 불빛이 발밑을 지나갔다. 권재형은 나머지 일들은 알아서 하라며 손짓하고 거래장소를 빠져나왔다. 짜디짠 바닷냄새가 코끝에 맴돌아 숨쉬기가 힘들었다. 권재형은 멀리 떨어진, 건설 부자재가 널브러져 있는 구석에 멈춰 선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다. 보랏빛 플라스틱 통 안에는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아 있었다. 권재형은 라이터를 흔들었다.

멀리서 소음이 들려왔다. 물건들이 부서지는 소리, 둔탁한 소리. 사이렌, 총, 고함. 등. 시끄럽고 난리 난 소음들. 익숙한 소리에 귀가 피곤하다. 권재형은 눈을 감는다. 권재형의 콧잔등 위로 빗물이 뚝, 뚝. 떨어졌다. 권재형 눈을 뜨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에서부터 멀어지듯 발을 옮긴다. 권재형은 먼지 가득한 장소를 걸으며 숨을 쉬었다. 머리 위로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비를 맞아 진해진다. 권재형 멈춰서서 담배 한 개비 꺼내 입에 문다. 라이터를 켜보지만, 비가 떨어져서인지,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불이 붙지 않았다. 권재형 주변 돌아보다 먼지 쌓인 작업장에 들어간다. 등 뒤로 구둣발 소리가 들려서 피식 웃고 뒤를 돌아본다. 주석재다.

“자기, 오랜만이네.”

비가 온다. 간이식 건물 천장에 빗줄기 떨어져, 텅 빈, 컨테이너 안에 빗소리가 울렸다. 텅, 텅, 텅. 싸우다 다친 건지 주석재 셔츠 위로 피가 새고 있었다. 권재형은 담배 끝 물다 라이터 점화한다. 역시 기름이 문제인가. 권재형은 피우지도 않은 담배 땅바닥에 버린다. 주석재는 피가 나는 곳 손으로 꼭 잡고선 한 손 리볼버 든 채 걸어왔다. 주석재 바라보며 살벌하네. 짧게 말하고 킥킥 웃는다. 많이 다쳤나. 비도 오고, 춥고, 피도 많이 난 것 같은데, 저렇게 있다간 곧 죽겠다. 권재형 주석재에게 다가간다. 주석재는 핏기 가신 손으로 리볼버를 든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곧 떨어질 것만 같이 보였다.

권재형은 주석재 총구 잡는다. 두 눈 마주친다. 주석재 표정 한참을 바라보던 권재형 입꼬리 올려 웃다 입 벌리곤 총구 물었다. 익숙한, 반대된 생황에 주석재와 눈 마주치고, 눈꼬리 휘어 웃었다. 붉은 혀 움직여 가볍게 핥아내다 입술 떼어낸다. 침선이 길에 늘어졌다 끊긴다. 여전히 밖에선 굵은 빗줄기가 떨어진다. 시끄러운 인위적인 소리도, 사이렌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권재형은 창문 밖을 바라본다. 세상이 흐리다. 젖은 머리카락 귀 뒤로 넘긴다. 권재형 총 잡는 주석재 손 위에 제 손을 겹친다. 손이 찼다. 권재형은 주석재 손 끌어와 제 이마에 가져다 댄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총구를 당겨. 주석재.”

바보 같은 주석재. 멍청한 새끼. 주석재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내린다. 손에 힘이 빠진다. 컨테이너 안에 텅, 하는 총이 떨어진 소리가 울린다. 주석재, 초점이 흐려져 풀썩 쓰러진다. 권재형은 헛웃음 짓고 쪼그려 앉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권재형 한숨 쉬고 담배 새 개비 꺼내 입에 문다. 라이터도 없는데. 권재형 괜히 라이터 칙칙 켜본다. 아, 붙었다. 기대는 안 했는데 담배 끝이 하얗게 타간다. 권재형은 숨을 들이쉰다. 사람도 못죽이는 새끼가 총은 왜 들고 다니는지. 한숨 같은 연기 내뿜고 주석재 셔츠 찢어 흐르는 피 꽉 동여매 지혈한다. 재킷 벗어 주석재 덮어주고 작업장 빠져나온다. 입맛이 썼다.

한동안 평생 먹을 욕이란 다 먹어서 권재형, 죽음과 더 멀어졌네. 하는 농담 같은 생각 흘렸다. 물론 권재형이 정보를 흘렸다는 사실은 정보원과 엄마를 비롯한 고위 간부밖에 모르지만, 책임이 컸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죽음으로 책임졌겠지만 권재형이었다. 한 조직의 보스이고, 제일 윗 대가리인 야쿠자의 친딸. 일본으로 불려간 권재형, 푸릇한 잎이 돋은 벚나무를 바라본다. 봄이면 예쁘고 붉게 피어나는 꽃은 희극이었다. 이 나무는 물로 자랐나, 피로 자랐나. 가끔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권재형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인 권재형 앞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카타나를 닦다 권재형 앞으로 서류 봉투 툭 던졌다. 권재형은 고개를 들고 서류를 열었다. 주석재 사진이었다.

주석재와 함께 있는 사진 몇 장, 수신 내역, 데이트했던 사진들과 권재형이 알지 못한 주석재의 약점 담긴 인적 사항. 등. 마지막으로 주석재가 입원해있는 병실까지. 놀라진 않았다. 한숨만 나왔다. 잭폿 혹은 쪽박. 한 사람은 정리가 되어야만 했다. 둘 다 행복하게 살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권재형은 서류를 챙겼다. 작은 상 위에 일렁이는 불빛을 응시하다 앉아있는 엄마 항해 절을 하고 집을 나왔다. 사람의 삶은 덧이 없었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 사는 권재형. 이번 건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났는지. 권재형 생명의 무게가 무거웠지만, 짊어진, 미련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무렇지 않았다. 제로에 무한을 곱한 죄책감이었다. 권재형이 죽지 않고 산 책임은 주석재가 물어야 했다. 그러게, 방아쇠를 당겼어야지. 가끔 권재형, 귓가에 빗소리가 울린다. 컨테이너를 치던 굵은 빗소리와 네 구두 굽 소리.

권재형은 경찰로 소포 하나를 보냈다. 조작에 가까운 진실인, 어차피 그쪽에서도 책임을 질 사람이 한 명쯤 필요하니 이해관계가 들어맞는다. 주석재. 열정 과다로 파면당하게 생겼네. 주석재가 경찰이면 어디 쪽이든 다 피곤했다. 굽히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파대니 죽거나 경찰을 그만두거나. 둘 중 하나인 결말이 예견되어 있긴 했으니 이상적인 결말이다. 보낸 소포는 정리되어있지 않은 자료들로 가득했다. 어떤 이유로 잘릴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에서도, 뭐, 주석재를 아끼는 사람도, 방패로 쓰려고 하는 사람도, 다 주석재의 사직을 권하겠지. 목숨을 위해, 책임 전가를 위해. 권재형은 어둡고 퀴퀴한 사무실에서 주석재를 생각했다. 이젠 만날 일도 없겠네.
05. 죄






“재형... 아......! 아!”

권재형, 밑 이 남자가. 다시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던 재미없는 남자가 달뜬 숨을 내뱉고 있는 건. 하, 웃음도 안 나온다. 경찰에 잘리고 찾아온 게 권재형이 이끄는 조직이라니. 이젠 진짜 그만둔 게 됐네. 이렇게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있어? 눈 둘 곳 찾지 못하던 주석재는 쭈뼛쭈볏 사무실로 돌아와 갈 곳이 없다며 입을 열었다. 생각난 게 너밖에 없었어. 하고. 담배 피던 권재형, 꼬았던 다리를 피곤 담배 재떨이에 비벼 껐다. 창문을 열었다. 매연 연기가 넘어왔다. 날이 맑았다.

주석재는 긴장한 표정으로 권재형 바라본다. 주석재는 경찰복을 차려입고 서로 출근을 했다. 사무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주석재를 힐끗거리는 시선들에 주석재는 무슨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주석재는 상부의 호출에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일어났다. 서장실 문을 닫고 나온 주석재는 창밖을 바라봤다. 날이 맑다. 잠시 쉬게. 석재는 무슨 말이냐 물었지만 서장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말 할 수 없다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서장은 이 참에 휴가도 좀 즐기고, 잠잠해지면 다시 불러주겠네. 라고. 석재 달래듯 말했다. 석재는 왜, 어째서,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탁, 서장실 문이 닫혔다.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악에 굴하면, 경찰 존재 의의가 뭘까. 주석재는 권재형을 조사했던 자료를 정리했다. 권재형. 직계존속이 야쿠자라고. 일본 일대를 꽉 잡고 있어 건들기도 힘들다 그랬지. 범죄집단은 시간이 흘러가며 기업화 되어갔다. 기업의 탈을 쓰고 범죄를 저지른다. 권재형 생모의 야쿠자 집단도, 전통을 중시 조경업을 하고 있다지만 실장은 고위 집안에 납품하는 마약을 관리하고 있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고, 그 밑으로 파생되어 권재형이 운영하고 있는 기업은 납품의 고리를 잇고 있었다. 브로커다. 수완이 좋은지 마약-무기를 이으며, 한국은 권재형이 먹었다고. 모두가 범죄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전국구로 연결되어 있는 맥은 혈과도 같아서 한 곳을 터트린다고 해서 잡히지도 않았고, 한 곳 잘못 찌르면 출혈이 컸다. 권재형네야 새로운 사람들을 갈아 끼우면 된다지만 경찰쪽은 경찰-정치인-고위 기업인-권재형. 이 연결고리가 있었다.

권재형을 건드리면 높으신 분들의 검은 돈이 흔들린다. 여기저기 권재형을 들쑤시고 다니는 주석재는 당연하게 눈엣가시였다. 주석재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천장에 숨이 막혔지만 굴허지 않았다. 권재형을 조사했던 자료를 상자에 넣으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경찰이 된 주석재. 사람이 꽉 막혀서 융통성이라는 게 없었다. 어린시절 어른의 말씀을 달 듣는 주석재를 보며 사람들은 너 정말 착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너는 말을 잘 듣는 아이구나. 주석재의 머리통을 헝클었던 그 커다랗고 다정하고 따뜻한 손. 칭찬은 주석재를 바르게 살게 만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묵묵히 한다. 불평불만은 의미가 없었다. 날을 새가며 공부하는 주석재를 보며 친구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냐 물었고, 부모님을 비롯한 선생님은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격려했다. 전교 일등에 반장에 학생회장. 장남. 책임의 무게를 알 듯 깐깐하게 규칙을 지키는 주석재. 모두 주석재를 보며 말했다. 너는 경찰하면 잘 하겠다.

꼭 되어야겠다는 꿈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학 원서를 넣는 가을 6개의 대학 중에 경찰대학을 넣었고. 붙었길래 갔다. 주석재의 세상은 주석재가 본 만큼의 크기만을 가지고 있었다. 평화롭게 살아온 주석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원, 동아리, 대외활동. 대학교 전공까지. 주석재가 만나온 주석재 주변 사람들은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놓쳐버린 버스에 분노하고, 횡단보도 앞에 서자바자 바뀐 초록불에 신나하는. 소소하고, 검소하고, 평범하게 정의로운 사람들. 전공수업을 들으면서 범죄유형이나 범죄자들을 조사하면서. 주석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은 왜 범죄를 저지르면서 사는 거지? 사회를 해한다. 가진 거에 만족하면서 자신을 위해서 사회에 섞어들어 자신몫의 삶을 살아야하는 게 아닌가. 우리의 정의는 공통되어 있던게 아니었다. 의무교육을 넘어 고등교욱을 받고 있는 주석재는, 주석재가 모르던 세상을 혐오했다. 주석재가 살고 있던, 주석재의 주변을 이루는 세상은 한없이 선에 가까웠으니까.

주석재의 선배들이 주석재를 불러서 경고했다. 권재형은 위험하다고, 그만 파는게 좋겠다고. 주변의 걱정에도 주석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주석재 보며 하던 걱정들은 욕으로 변했다. 상부들도 가만히 두는 권재형을 니가 무슨 권한으로 찌르고 다니냐는 거였다. 그런 말에도 주석재. 당연히 해야할 일이니까 해야합니다. 밤죄를 묵인하자는 겁니까? 하며 고지식한 말만 뱉어왔다. 주석재가 권재형을 따라다니면서, 주석재는 잃은 사람이 많았다. 융통성이라는게 없으니 하루종일 권재형만 붙들고 있었고, 친구는 물론 가족과도 만나지 않았다. 권재형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석재 주변인들의 서운함은 질책이 되었다. 그래도 주석재는 멈출 수 없었다. 조금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이 희망이 문제였다.

억울한 감도 없지 않았다. 권재형 애인 행세하며 사소한 정보 하나라도 캐기위해 붙었다. 주시하고 있던 권재형이 모를래야 모를 수도 없을 만큼 저를 닮은 사람만 만나고 다니니 이 편이 더 효율적으로 정보를 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권재형은 주석재에게 이름모를 서류를 보내왔다. 권재형이 갑자기 왜, 업무로 사용하지 않던 휴대폰 이용하며 사진을 보내왔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주석재는 권재형을 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주석재가 챙기지 못한 주변인들을 향한 죄책감은 권재형을 잡기위한 노력의 연료가 되었다.

주석재는 권재형을 쫓았다. 권재형은 그동안 주석재가 배웠던 악의 집합체였다. 그 과정에서 다치든, 죽든, 주석재 자신이 어떤 피해를 봐도 개의치 않았다. 증오에 가까운 사명감이었다.

그때, 비오는 날에, 컨테이너 안에서. 주석재는 권재형을 쏘지 못했다. 방아쇠를 당기라는 궍형의 목소리에 죽이지 못했다. 살인은 죄잖아. 주석재 다운 이유에서 였다. 주석재는 흐려지는 의식으로 권재형 바라보며 생각했다. 법의 심판을 받고, 착하게 살자. 그 뒤로 어떻게 됐지 눈을 뜨니 병실이었고, 권재형은 놓쳤다. 오랜만에 출근했던 서에서는 쉬라는 말을 들었다. 주석재는 권재형에 관한 서류만이 담긴 짐 한상자 들고 서에서 나왔다. 뒤를 돌아본다. 처음 부임했을 때의 설렘과는 다른 긴장감이었다. 막막함도 조금. 주석재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주석재는, 권재형을 찾아갔다.

빌딩 밑 경적이 들려왔고, 도시 소음이 사무실 내에 퍼졌다. 권재형은 주석재 한참을 바라보다 헛웃음 짓고는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집에 돌려보냈다. 보내고, 보내고, 보내도. 이 남자는 끈덕지게 따라와서 권재형 근처를 알짱거렸다. 권재형 하도 어이가 없어 툭, 권했다.

“우리 집 올래?”

내 옆에서 아양이나 떨어. 하고. 주석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같은 새끼가 아니라 미친 새끼인가. 주석재는 눈치 살살 보면서 권재형이 좋아할 행동만 보였다. 예쁘게, 웃으면서, 달게 굴기. 권재형은 주석재를 집에 들이며 새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적당히 허름하고 깔끔하고 외진 오피스텔 하나 통째로 사서 제일 높은 층 중간 방 주석재 가두듯 넣었다. 권재형의 집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3분 거리 이상 벗어나면 안 되고, 우리 들개 따돌리지 말고. 예쁘게만 굴어.

권재형은 퇴근하고 주석재를 찾았다. 잡아놓고 방치하기도 웃겨서 겸사겸사 주석재가 머무르는 오피스텔로 갔다. 주석재를 감시하고 있는 조직원에게 오늘 석재가 무엇을 했는지 보고받을 겸, 퇴근 하는 길에 들렀다. 오피스텔에 들어가면 주석재는 자존심도 없는지 다정한 행동거지로 권재형을 반겼다. 권재형은 주석재가 차려놓은 저녁을 먹으며 주석재를 바라봤다. 일상의 반복이었다. 주석재가, 이 조그마한 오피스텔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용케 무기력하게 있진 않은 모양이다.

권재형은 주석재의 뺨을 쓰다듬었다.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잘했다며 짧게 칭찬했다. 권재형은 주석재 바라보다 자기야, 내일은 뭐할거야? 물었다. 주석재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일은 빨래를 할 거라고 답했다. 휴대폰도 없고, 돈도 없고. 권재형이 주석재에게 허락한 건 집 앞에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뿐인데. 청소하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참 열심히도 산다. 권재형은 피식 웃으며 주석재 머리 헝클었다.

주석재를 오피스텔에 가둬뒀던 이유는 변덕에 가까웠다. 귀찮아서 뭐라도 쥐어주고 치워버리려는 속셈도 있었다. 갇혀살다가 답답해지면 알아서 탈출하겠지. 그러면 권재형은 몇 번 주석재 잡으려고 노력하는 척만 했다가 포기했다고 살던대로 살면 된다. 깔끔한 계획에 권재형 주석재가 가만히 방에서 권재형을 기다릴 때까지만 놀아주자 생각했다. 고분고분 웃으면서도 도망갈 방법을 찾을거라 예상했는데, 주석재. 의외로 적응을 잘 하면서 살기에 헛웃음이 났다.

주석재라도 탈출하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주석재가 머무르고 있는 이 집이 권재형이 실 거주하는 집고 아니었고 문 밖에는 권재형이 들개라고 부르는 감시원도 서있었다.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잡혀있다는 기분이 들어 탈출하긴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휴대폰도 빼앗기고 돈도 없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감시원과 동행해서, 감시원보고 결제해달라 하라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도 안되니까. 주석재는 할 일이 없었다. 권재형이 심심하면 읽으라고 가져다준 책을 읽었다. 베스트 셀러 10선인지, 힐링에세이도, 20대 필수독서도, SF소설책도, 로맨스 소설도 있었다. 장르가 다양했다. 책을 읽고도 시간이 남아서 주석재는 가볍게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운동했다. 땀이 나기에 시원한 물로 샤워도 하고 나왔다. 저녁 7시가 되면 권재형이 찾아왔다. 권재형은 주석재가 잘 있는지 보고 갔다.

공부만 하고 사느라 집에서는 텔레비전도 보지 않았고, 휴대폰은 전화 용도 이외에 쓰지 않았으니까 주석재는 이 삶이, 감시만 붙었다 뿐이지, 행동에 제약만 조금 있다 뿐이지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되는 삶이, 남들 다 원하는 백수같은 삶 아닌가. 퇴근하고 돌아온 권재형은 오늘은 뭐했다고 품에 안겨왔다. 권재형의 온기가 따뜻해서 무의식적으로 마주 않고 내려다보면 권재형은 뺨을 쓰다듬어왔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권재형이 퇴근하고, 피곤한 얼굴을 하면서도 매일, 그렇게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발걸음도, 주석재 신경쓰는 듯한 애정 한 끗 이라. 주석재 무의식 어딘가 작게 붙어버린 미운 정에 그런 권재형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이대로 살아도... 까지 생각했다가 정신나간 소리하지 말자며 몸 움직였다.

권재형은 주석재를 뚱하게 바라본다. 주석재가 오늘 무엇을 했고,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니 주석재 말을 멈추고 권재형 눈 마주친다. 왜? 하며 어색하게 웃는다. 권재형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젓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지 반찬은 또 언제 했는지. 잘 집히지도 않는 콩자반 콩 집어 입에 넣는다.

오피스텔 안은 기이하리만큼 평범해서 권재형 닭살이 돋았다. 주석재 향으로 가득한 깔끔한 방은 포근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여전히 주석재는 질리지도 않는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떠들어댔고, 집밥이 그리워질 만한 요리들을 차려놓으며 권재형 기다렸다. 권재형은 물었다. 밥은 왜했어. 하고. 그 말에 주석재는 어색하게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하고 웃었다.

권재형은 집밥을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아버지와 살 때도 요리는 여자의 역할이라며 어렸던 권재형을 시켰다. 권재형 조그마한 손으로 할 줄 아는 요리 없어 밥 지은 척 용돈 겨우 모아 햇반 돌려 밥통에 넣었다. 다 처리 못한 쓰레기에 종아리 혈 선은 늘었지만 서툰 요리 실력이 나아지지 않아 맛이 없다며 귀에 못이 박힌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보단 나았다. 그때 바들거렸던 권재형의 칼질이 사람을 향하게 될 거라 누가 예상했을까. 찾아갔던 어머니도 집밥이라기보단 집에 상주하는 요리사가 해준 정식이었으니 권재형은 집밥을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포근해지는 단어와, 이 집 따뜻한 온기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풀옵션으로 비치된 가구들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던 오피스텔이 사람 사는 집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었다. 아직도 권재형의 집은 사무실과 같은. 담배 냄새. 꿉꿉한 마른빨래 냄새. 쌓인 먼지 냄새. 계약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한 새집 냄새로 가득한 데 비해 주석재가 머무르기 시작한 집은 주석재 향이 났다. 권재형은 헛웃음을 삼킨다. 은은하게 사람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평범한 향들이 권재형 삶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매연과 폐가 썩을 것 같은, 먼지들은, 재채기는 유발해도 심장 한 구석께를 간질이지는 않았다.

권재형은 퇴근하면 주석재를 찾았다. 섹스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간 것도, 감시하겠다는 목적으로 간 것도 아니고. 그저, 잡아뒀으니까 얼굴은 봐야지 하는 책임감. 매일 보는 주석재의 얼굴에, 답답하지도 않은지 이 조그만 구역에서 할 일 찾아 하는 주석재의 태도에. 권재형은 픽 웃으며 젓가락 내려놓았다. 주석재 향에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다. 권재형은 주석재 눈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잘린 거 내가 지시했어.”

주석재가 말을 멈췄다. 정적이 길었다. 권재형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 내곤 입꼬리 굳혔다. 권재형 팔 휘둘러 식탁 위 반찬들 탁 밑으로 떨궜다. 식기가 깨지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맨다리에 깨진 유리 파편이 튀어 따끔했다. 주석재 상황을 가늠하듯 얼빠진 표정으로 권재형 바라본다. 권재형은 입술 비릿하게 올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 앉아있는 주석재 앞 식탁 밀어 틈새 만들고는 식탁 위 앉아 주석재 마주 봤다. 내려다본 표정이 얼빵했다. 권재형 웃으며 주석재 턱 잡는다. 권재형은 허리 숙여 주석재 입술에 제 입술 포개었다. 쪽, 쪽, 가벼운 입맞춤 남기다 우악스레 턱 잡아, 틈 벌려 혀 섞는다. 주석재는 응하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권재형 바라본다. 주석재는 키스할 때 눈을 뜨는 편이네. 하는 농담 어린 생각하고는 입술 떼어내 눈꼬리 휘어 눈 마주친다.

권재형은 웃음이 나왔다. 식탁 밑으로 떨어진 다리를 흔들었다. 주석재 표정이 가관이었다. 노려보는 건지, 당황한 건지. 충격을 받은 건지. 아니면 아직, 상황 파악 중인 건지. 권재형은 주석재 뺨 톡톡 치고는 내일 택배 하나 갈 거야. 잘 빨아서 입고 있어. 하고 속삭인다. 권재형은 주석재 집에 홀로 둔 채 인사도 하지 않고 문을 나선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목이 따끔했다. 유리 파편이 박힌 모양이다.

권재형이 집으로 보낸 소포는 석재가 입던 경찰복이었다. 명찰에 배지까지 알차게 달린 사용감 넘치는 복장. 선물을 받는 주석재가 어떤 기분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권재형은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막 받은 주석재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집을 찾으니 주석재, 경찰복을 입고 있어 웃음이 나왔다. 문을 열자 보이는 주석재의 모습에 한참을 배 잡고 웃었다. 권재형은 웃음을 토해내다 눈동자 탁해져 주석재 입 맞췄다. 그 과정에서 주석재의 감정이나 의사는 존중되지 않았다. 넌 날 싫어할 필요가 있어, 주석재.

주석재의 세상은 주석재가 아는 만큼의 크기만을 가지고 있었다. 오피스텔 한 칸 만큼의 세상. 반찬통이 떨어져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주석재의 조그만 세상은 지구에 비하면 반찬통만큼도 되지 못했는데. 기이하고 평안한 생활에 익숙해져서는 안되지. 주석재는 권재형이 떠난 집을 청소하면서 검지가 파편에 베었다. 그렇다고, 밥상을 엎을 필요까지는 없잖아. 매일 권재형과 함께하던 저녁식사. 권재형이 잘 집어먹던 반찬, 편식하던 피망과 한알한알 집던 콩자반이 떠올라서 따끔, 하며 검지에 피가 맺혔다. 주석재,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불이꺼지듯, 어둠이 밀려오듯, 훅 끼치는 막막함.

악취미다. 제 손으로 끌어내려 놓고선 네 전 모습에 꼴려하다니. 네 무너지는 입꼬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쪽쪽, 가벼운 입맞춤. 마찰음 들려온다. 네 단추 맨 위 손 올려 하얀 단추 툭툭 푼다. 얇은 셔츠 밑으로 탄탄한 네 몸이 닿는다. 규칙적인 운동으로 잘 짜인 몸, 생활 근육 위 자잘한 생채기들이 꼴려. 주석재의 혐오 어린 시선에 눈웃음으로 마주친다. 온몸으로 싫어하는 티를 내면서도 권재형 명령 거부하지 못해 차려입은 주석재. 권재형은 주석재 뺨 쓰다듬으며 이마 맞댄다.

“나 사랑하잖아, 웃어야지 주석재.”
“내가?”

사랑, 이라는 말에 실소를 터트린다.

“사랑하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랑을 입에 담는 심리는 뭘까. 넌 나를 싫어할 필요가 있어, 석재야. 권재형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을 맞춘다. 일상을 깨뜨린 이후로 권재형은 오피스텔의 문이 열리면 다짜고짜 입을 맞춰오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면 주석재의 얼굴이 보였고 권재형 주석재 목에 팔 걸어 입을 맞췄다. 권재형의 평범한 삶이란 이런 모양이다. 그러면 주석재 입술 떼어내고 빨개진 얼굴로 숨 헐떡이며 잠깐만, 하고 밀어낸다.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보면 사귀는 사이인 것처럼 먼저 씻으라거나 밥은 먹었냐거나. 그런 흔해빠진 물음이 들려온다. 아, 정말 귀엽다니까. 혐오하는 감정도 제대로 숨기지 못하면서 다정하게 군다니. 이런 인간이 세상에 더 있을까? 권재형 주석재 귀 만지작거리다 석재 단추 풀어낸다.

“그런 게 필요해?”

얌전히 있어. 속삭인다. 주석재는 권재형 끌어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눈썹 내린채 권재형 바라본다. 주석재는 권재형이 안겨오는 품이 조그만걸 알아서, 할 말이 많았다.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하다는 걸 알아서 의사따위 존중하지 않고 맞춰오는 입술에 할 말이 많았다. 권재형의 올라가는 붉은 입꼬리가 익숙했고 이질적이라, 주석재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결국 입술만 앙다문채 권재형 올려다보는 주석재. 불쌍한 표정이네. 권재형은 가끔 숨이 막혔다. 죄책감인가.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으니 어찌 되었든 삶을 유지해나가는 권재형이 고결한 주석재를 바라보는 웃는 미소는 비웃음에 가까웠다. 지독한 열등감이자 증오였다. 주석재를 오피스텔에 가둬둔 이후로 권재형은 숨 막히는 기분이 들면 입을 맞췄다. 네 호흡을 빼앗아 숨을 쉰다. 단단히 붙잡은 뒷목에서 네 조그만 맥박이 느껴져 손에 힘을 쉬면 너도 숨을 헐떡일까 얄궂은 생각이 들어 네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권재형은 살살 웃으며 주석재 뺨 쓰다듬는다.

“자기야, 왜 이렇게 울상이야.”

권재형은 실실 웃음이 났다. 역시 강력한 적의가 더 편하다. 권재형은 석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언제나, 그렇듯, 적당히 만족했다 싶으면 씻고 오피스텔을 나선다. 권재형은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정장 감시원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계단을 내려간다. 조용한 새벽 오피스텔 현관은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담뱃갑이 만져졌다. 권재형 전봇대 근처로 가 담배를 입에 문다. 주석재가 사는 방을 올려다본다. 숨이, 메케했다.

권재형이 타인과 나누는 숨은 언제나 달았다. 권재형이 아는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이 다였고 물질적인 사랑이었으며, 사랑한다는 허울뿐인 말을 속삭이는 사랑이었다. 한순간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에 빠져 애정을 속삭인다. 권재형에게 사랑해달라며, 사랑한다고 매달려온 사람들 또한 비슷한 사랑을 했다. 권재형은 언제나 예쁘장하고 조그맣고, 뽀얀. 애들만 만나왔다. 연예인이 되고 싶고, 배우가 되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돈을 많이 먹고 싶다는 다 각자의 이유로 목에 팔을 걸어왔다. 권재형은 그런 이들에게 가볍게 입을 맞춰주며 낮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뭐하고 싶은데. 물었다. 그럼 상대는 말갛게 웃으며 권재형 양 뺨 잡고 드라마가 하고 싶어, cf가 찍고 싶어, 하며 입을 맞춰왔다.

그 순간들이 싫지 않았다. 예쁜 애들이 예쁘게 웃으면서 사랑을 속삭이는데 싫은 건 고자 새끼 아니야? 사랑한다며 달큰한 말들 주고받는 게 사랑이잖아. 권재형은 주석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연기하는 이유와 원초적인 사랑의 정의가 궁금해졌다. 사랑. 사랑의 이응 받침은 둥글어 입안 길게 남는다. 띠링, 하며 문자 알림이 올렸다. 권재형은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나비였다.

[안아주세요]

권재형은 픽 웃으며 갈게. 하는 답 보내고 발걸음을 옮긴다. 찾아간 방. 무겁지 않게 혀를 섞고, 침대에 누웠다. 겹쳐지는 온기에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렇게, 몇 분을. 말 그대로 안고만 있기에 권재형은 물었다. 안아달라며? 안고 있잖아요. 말장난하자는 거야? 가끔은 이런 것도 귀엽지 않나요. 싫으면... 하며 제 단추 풀어왔다. 권재형은 됐다고 말하며 마주 앉았다. 사랑해요. 라고 속삭여 오길래 권재형 짧게 침묵하다 물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권재형의 물음을 들은 나비도 짧게 침묵했다. 권재형과 두 눈을 맞춘다. 어두운 호텔 방. 하얀 침대 위는 넓은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나비는 입을 달싹이다 한 번 더 침묵했다. 그리고 작게 속삭이며 권재형의 품을 파고들었다.

“......연기할 수 있는 거요.”

맞지, 사랑이란 연기지. 주석재의 연기도, 사랑이고, 주석재는, 날 사랑, 하나? 속내를 모르겠다. 권재형이 했던 것도 다 사랑이지. 사랑을 속삭이면서 순간을 소중히 여기니까. 사랑이지. 가족들이 다 하던 책임과 의무도, 나름의 이상적인 가족을 연기했던 그, 시기도 다 사랑이었지. 그렇다면 권재형은 주석재를 사랑하나. 권재형이 사랑 같은걸. 부딪히는 모순에 해답을 찾으려다 잠에 들었다. 긴 꿈이다. 너무 뒤죽박죽이라 언제가 과거고 언제가 현재이며, 언제가 미래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오다가도, 주석재가 나오고, 엄마도 나오고, 지나간 인연들도 나오고, 가끔은 이미 죽은 사람도 나왔다. 악몽은 아니었다. 오묘할 정도로 묘한 두루뭉술한 꿈같은 꿈. 행복하진 않았지만 불행하지도 않은 감정. 새로 옮긴 사무실에서 조직원들과 자장면을 먹는, 옷에 피가 튀었다기에 권재형 건넨 법인카드에 감사하다며 활짝 웃는 조직원, 깨끗했노라 당당하게 말하진 못하지만, 당신이라서 즐거웠다던 여배우. 감사했습니다. 라며 꽃다발 든 채 사무실 방문한, 이제는 손 털어 자영업 중인 옛 종업원. 그런데 얘는 어리긴 했어. 손에 피도, 상대적으로 덜 묻었잖아. 꿈도 있었고. 꿈, 그래, 권재형을 스쳐 지나가는 꿈들, 평범의 반복. 평범하기에 기이했고, 기이하기에 평범했다.


총소리가 들려오고 경련하듯 잠에서 깨어났다. 알람 소리였다. 평범하게 울리는 부드러운 소리에 권재형, 팔을 뻗어 알람을 끈다. 자는 나비의 얼굴을 바라봤다. 주석재 닮아 놀았던 애인데, 하나도 안 닮았다. 주석재는 연기 같은 건 하나도 못 하고, 고지식한 놈에 융통성도 없다. 이렇게 고운 인상도 아니지. 새근새근 잠든 나비 한참을 바라보다 이마에 입 맞춰주고는 나비 휴대폰 밑 지폐 몇 장 두고 방을 나왔다.

권재형은 사무실에 의자에 앉아 서류를 검토했다. 정오를 가리키는 시간에 권재형, 야~ 막내야~ 하고 부른다. 오늘은 뭐 먹을까. 대화하다 앞에 새로 생긴 백반집이 기가 막히다기에 그러냐, 하고 빌딩을 내려간다. 백반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주문을 마치니 저렴한 어휘의 대화들이 수런수런 나왔다. 권재형 부하직원들 단속 시키고는 책 좀 읽어라! 자식들아. 하며 농담을 던졌다. 보스나 먼저 읽으십시오. 하는 목소리 가볍게 무시하고 금세 나온 반찬 바라봤다. 콩나물, 김치, 깻잎, 장조림, 진미채, 깍두기, 콩자반. 콩, 콩. 권재형 젓가락 들어 콩자반 집는다. 입 안에 넣었다. 정갈한 맛이 입 안에서 풍긴다.

와, 이거 좀. 짜증 나네. 권재형은 계속해서 주석재를 생각했다. 사무실에 들어와 서류를 넘기면서도 기이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주석재는 경찰도 아니고, 정부도 아닌데 계속해서 잡아두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 조그만 오피스텔에 가둬놓고 계속 찾아갈 이유도 없고. 답지 않게 사랑이니, 애정이니. 감성적인 생각에 잠겨선 멍청해질 뻔했다. 다 주석재의 콩자반 때문이다. 저렴한 인스턴트나 먹고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지, 굳이, 반찬을 하고, 식사를 해서, 애인마냥 굴어서. 답지 않게, 굴게 만들었는지. 어차피 권재형이 사랑했었던, 타인들과 같은 존재라면 정리하면 되잖아. 권재형은 한동안 헤매던 해답을 찾은 듯 해 픽 웃는다. 권재형은 한동안 주석재를 찾지 않았다.

06. 뒤들림






주석재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가족관계도 그랬고, 교우 관계도 그랬다. 인생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도 한국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합니다. 라는 표본으로 보여주어도 될 정도로 정형화된 삶이다. 주석재는 툭 튀거나, 욕먹고 싶지 않았다. 미움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 주석재는 나만 잘하면 미워하는 사람 하나 없는 주석재의 세상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었다, 그런 주석재의 삶에 겹쳐든 인물이라면 권재형이다. 주석재는 권재형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작각이 없었다. 잡아 넣어야하는 범죄자고 처단해야할 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주석재는 권재형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이후부터, 주석재는 권재형을 잡기위해 맹목적일 수 없었다. 주석재가 가지고 있던 사명감은 악을 처단하기 위함이지 사람을 심판하겠다는 오만함은 아니었으니까. 권재형은 주석재와 정 반대의 인생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떨어져 산지 오래고, 학교는 중퇴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다. 애인은 육체적인 관계였으며 모든 감정을 돈으로 해결했다. 주석재는 권재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7시면 문이 열리지 않을까 현관을 바라봤다. 문에 들어오며 안겨오던 권재형의 체향. 손에 잡히면 권재형의 붉은 머리카락이 생각난 탓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웃으라는 권재형. 사랑이 무엇인진 알고 저러나. 뺨을 쓰다듬어 오던 권재형의 손길이나 곱게 휘어 웃던 권재형의 눈빛을 봐버렸던 주석재는 권재형의 붉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옅게나마 붙었던 정, 바닥까지 떼려는 듯 미운말만 골라서 해댔다. 그렇기에 주석재는 권재형이 참, 불쌍했다.

권재형 노려보던 증오는 권재형이 찾지 않는 시간동안 희석되어 갔다.

권재형은 일에 치여 살았다. 주석재를 찾아가느라 야근하지 않고 미뤄뒀던 일들을 끝마치고 새로운 계약을 맺고, 권태롭지 않을 만큼 사람을 만난다. 일상에 균형을 되찾았을 때쯤 권재형은 주석재를 불렀다. 꿉꿉한 사무실에 들어온 주석재는 햇빛 및 향긋한 빨래 냄새가 났다. 권재형은 주석재 보지도 않고 서류에 시선 고정한 채 말했다.

“질렸으니까, 너 알아서 살아.”

주석재는 답이 없었다. 권재형은 조용한 반응에 무심하게 고개 들었다. 주석재는 권재형의 행동 패턴을 종잡을 수 없었다. 다정하다가도 매몰찬 사람.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해주길 바라는, 그러면서도 거짓된 사랑만 찾는 권재형. 어렸을 때부터 손에 권력을 쥐었던 권재형은 모든 일을 혼자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니 관계를 대하는 태도도 비슷했다. 혼자 생각하고, 이성적인 결정을 내린다. 상대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권재형 말에 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석재는 권재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미건조한 시선의 권재형을 바라보다 입을 연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내가, 더 잘할게.”

애절한 표정의 주석재. 하긴, 갈 곳이 없나. 직장도 없고, 돈도 없고. 역시 갑자기 쫓아내는 건 좀 그런가. 권재형은 주석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권재형도 자신과 주석재는 정반대인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청렴, 고결, 깨끗하게만 자라왔을 주석재. 권재형은 주석재를 바라보면 내장부터 뒤틀렸다. 보내줄 때 가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주석재가 내뱉는 사랑은 기만에 가까워 가진 모든 걸 잃어도 태연하게 사랑을 내뱉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은 권재형이 맺은 관계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권재형은 불쾌함에 주석재 올라탔다. 주석재가 얼굴을 붉히면서 숨을 헐떡대면 권재형, 눈 마주치고 속삭였다. 사랑해. 하고.

권재형의 결핍, 열등감. 채워지지 않았던 모든 걸 주석재가 가지고 있었다. 권재형은 바란적이 한 번도 없는데, 주석재가 있으면 자꾸,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면 갈망할 일도 없는데, 주석재가 있으면 권재형은 필연적으로 주석재를 신경쓰게 된다. 치워도 주위 맴돌며 권재형 시선 끌어갔다. 심지어 주석재는 권재형의 제멋대로 구는 행동에도 주석재스러운 행동만했다. 권재형 맞춰주는 듯 굴면서도 결국은 주석재였다. 평범함. 깨끗하고 고결하고 청렴하고 바른. 권재형은 주석재가 만드는 일상이 기이했다. 한 테이블에서 하는 식사나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는 소박함 같은 것들. 권재형의 평범은 일반적인 기이함이었으므로, 권재형의 기이함이 평범이 되어서는 안됐다. 권재형이 가질 수 있는 건. 기분, 흉내. 보이지 않는 말뿐인 것이므로.

권재형은 하루빨리 주석재를 치워버리고 싶었는데, 또 다시 도돌이표다. 그래도 이제 주석재는 경찰도 아니고, 권재형의 무엇도 아닌데. 언제나 그랬듯 권재형은, 권재형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 타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권재형은 피식 웃었다.

“그럼 우리 조직 들어올래? 와서 애교나 떠는 건 어때.”

주석재는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조직원들이 늘어 서 있는 사무실에서 권재형은 바로 옆에 주석재 세워 놓는다. 서류를 보든 말든 어차피 경찰과 연락할 수단이 없으니 정보가 새어 나갈 걱정도 없다. 가끔 입이 심심해지면, 권재형, 주석재 넥타이 끌어와 입 맞춘다. 소파에 앉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조직원들은 주석재 힐끗 보고 대화마저 잇는다. 주석재 온몸으로 껄끄럽다는 티를 내면서 어색하게 혀 얽어온다. 군말 없이 따라다니는 주석재. 옆에서 알랑이며, 같잖은 자존심 따위 없다는 듯이 구는 주석재. 권재형 주석재 뺨 쓰다듬는다.

“웃어야지.”

실소 섞인 웃음. 나 정말 싫어하네. 오히려 웃음이 나올 만큼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기분이 좋다. 권재형 주석재 놓아주고는 나비를 불렀다. 자존심은 주석재만큼 없는데, 주석재보다 애교 많고 야망 있는 단순하고 귀여운 나비. 권재형은 나비 무릎에 앉히곤 눈꼬리 휘어 웃는다. 머리도 쓰다듬고, 입도 맞춰주고 주석재는 없는 것처럼. 군다. 나비가 주석재를 향해 꼴좋다는 듯 웃는 것도 귀여워 가만히 놔뒀다. 권재형은 나비 턱 잡고 혀를 엮는다. 침이 섞이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린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주석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어떻게 하면 만족하겠어?”

권재형은 입술 떼어내고 피식 웃는다. 나비 입술 소매로 닦아주고는 팔 뻗어 주석재 귀 만지작거린다.

“그건 네가 고민해봐야지.”

주석재 권재형 턱 잡고 혀를 섞는다. 더럽게 못 하네. 권재형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란 사람은 눈짓으로 내보내고 주석재와 혀 엮는다. 주석재 넥타이 끌어와 소파에 앉힌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일었다. 막내 이 자식, 청소 좀 해놓으라니까 대답만 해놓고 농땡이 피웠네. 화장실 청소나 시켜야겠다. 생각하며 주석재 올라탄다. 주석재와 두 눈 마주치다 주석재 목덜미 단단히 붙잡고 입 맞춘다. 응하고만 있는 주석재에게 권재형 속삭인다.

“너 똑똑하잖아. 뭐라도 해보는 게 어때?”

주석재는 다시 입을 맞춰왔다. 입고 있는 셔츠 단추 풀어내고 권재형 바라본다. 풀어서 벗으면 막연히 좋을 거라 생각한 건지. 동그란 머리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권재형 웃으며 검지 세워 주석재 허리 살살 쓴다. 주석재는 밸트 풀어내고 권재형 올려다본다. 순진하고 웃기고 귀여운 자식. 권재형은 옷 위로 허리 살살 움직이다 이마 맞대고 시선 얽는다.

“이게 끝이야?”
“네가 이런 거 좋아하잖아. 가만히 있는 거.”

명백한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 권재형 피식 웃는다. 꼴에 노력하는 숙맥 범생이 새끼.

“넌 머리 굴리는 소리가 제일 귀엽더라. 흥 좀 돋궈봐, 걔 다시 부르기 전에.”

주석재 입술만 씹고 있다 권재형 올라탄다. 넌 뭐가 그렇게 절박해. 의문이 튀어나왔지만, 권재형 주석재 뺨만 쓰다듬는다. 주석재는 느리게 허리를 움직인다. 눈도 못 맞추면서 뭘 해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연기는 더럽게 못 해서 뭘 원하는 건지 추측도 안 된다. 사랑은 연기할 수 있는 거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비가 주석재를 본다면 그 말을 정정할텐데. 권재형은 주석재 뺨 쓰다듬는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필요 이상으로 매달리나. 주석재가 원하는 것. 명예도, 야망도, 사랑도 아니면 넌 뭘 바라며 이렇게까지 해. 권재형은 주석재 허리 짓에 옅은 신음 내뱉다 소파 옆 탁상에 놓인 담배 한 개비 빼 입에 문다. 라이터 칙칙 틀어 불붙이고는 지루한 표정으로 주석재 바라본다. 주석재 권재형 꽉 끌어안아 체중으로 누른다. 헉, 권재형 숨 깊게 들이마셔져 폐 속에 니코틴 가득 찬다. 하, 권재형 픽 웃고는 무너지는 입꼬리 올려 웃는다.

“왜? 자존심 상해서?”
“난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하잖아, 재형아.”
“내가 좋아하는 것 같아?”
“표정 보니까 좋아하는 것 같은데.”

비웃는 표정의 주석재. 권재형 자존심 무너져 주석재 엎는다. 주석재 위에서 담배 연기 쭉 빨아들이고 내려다본다. 주석재의 감정이나 생각이 어떻든 권재형이 존중해야 할 이유는 없다. 싫으면 네가 떠나면 되잖아. 너는, 너도, 왜. 그 단순한 걸 몰라서 내 옆에 있어. 주석재 머리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사랑한다고 말해봐.”

걔는 이러고 있으면, 시키기도 전에 사랑한다 매달려오던데. 너는? 무언의 물음담은 표정으로 주석재 바라본다. 백치처럼 아양이나 떨면 얼마나 좋아. 단순하게 바라고 원하는 게 한 단어로 내뱉어 주면 단순하고 좋잖아. 주석재 입술 바라본다. 맞대었던 입술에서 곱게, 부자가 되고 싶어, 성공하고 싶어, 명예가 갖고 싶어, 라거나. 지독한 혐오감을 담아 죽으라는 저주를 내뱉지 그래. 넌 왜 이렇게 살아. 뭘 위해서 이래.

“사랑해...”

그런 썩어있는 표정으로 잘도 사랑을 입에 담네, 네가 증오하는 내 밑에서, 달뜬 얼굴로 사랑한다 말하는 기분은 어때. 권재형 주석재 위에서 담배 뻑뻑 피워낸다. 몇 번의 허리 짓에도 네 표정에 흥이 식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재미없는 새끼. 권재형은 주석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권재형 휴대폰 꺼내 든다.

“방으로 와.”

주석재와 밤을 보내던 텔이자, 사랑을 물었던 방. 소박맞은 주석재, 권재형 잡지도 못하고 묵묵하게 옷깃을 추스른다, 주석재를 옆에 두면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게 재미있지도 않았다. 재미있는데, 재미없었고, 지루한데, 흥미로웠다. 짜증 나는데, 아쉽고. 한 단어로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아 권재형 피우던 담배 깊게 빨아들인다. 재떨이에 담배꽁초 버리고 흐트러진 옷매무새 정리한다.

“...가 봐.”

권재형은 시계를 차며 주석재 돌아본다. 권재형, 그렇게 주석재 표정 살핀다. 블라인드 쳐진 사무실은 어둡다. 불도 켜지 않아서 태양 빛만 은은하게 주변을 비추는 내부. 주석재의 눈가가 붉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상처받은 표정으로 목적 없는 곳에 시선 둔 주석재의 눈동자. 짙어져 가는 눈 밑 다크서클. 흐트러진 주석재의 셔츠는 권재형의 붉은 립이 번져 있었다. 올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내려 아마 덮었고, 권재형이 벗긴 안경에 흐린 시야, 습관적으로 찌푸리게 되는 주석재의 미간 바라보던 권재형은 눈꼬리 가늘게 뜨고 웃는다. 깨끗하고 고결한 밝은 인생을 나는 네게, 어두운 방에서 유독, 외로워 보였다.

“나 가지 말까?”
“나 때문에 그러는 거면 신경 쓰지 마.”

어색하게 웃는다.

“주제넘게 안 굴게.”

권재형의 웃고 있던 입꼬리 무너져 주석재 멱살 잡아 입 맞춘다. 기분이, 휙휙 바뀌네, 더럽게 신경이 쓰여. 넌.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는 거잖아. 굽힐지언정 꺾어지지는 않는 사람이잖아. 주석재. 애정 한자락 원하면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매달려와야지. 왜, 왜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해. 짜증 나게. 가끔 죽여버리고 싶어. 나를 동정하듯, 혐오하듯, 애정하듯 구는 너를.
07. 기이함






시간이 흐르면 감정은 희석된다. 권재형이 가질 수 있는 것. 기분, 흉내. 보이지 않는 말뿐인 거. 말이란 신기했다. 특히 사랑이 그랬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이었고, 사귀자 말하면 연앤관계였다. 그래서 권재형은 애인을 만들지 않았다. 말뿐인 관계라면 쉬었다. 가끔 보고 좋은 자극적인 만남. 어차피 헤어질 사이, 때가 되면 다 나아가고, 사라지고, 없어질 그런 것들. 그러기에 권재형은 현재에 충실했다. 상대가 예쁘게 웃어오면 권재형도 사랑한다며 끌어안았다. 감정은 희석되고, 기억은 남는다.

권재형이 주석재를 조직으로 들인 이후로 권재형은 타인을 찾지 않았다.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일하고 석재랑 퇴근하고. 욕구가 쌓이면 주석재 눕히면 될 일이니 굳이, 새로운 관계를 찾아 나설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오늘 저녁에 뭐 먹을래? 묻는 주석재의 물음에 너, 라고 대답하는 권재형. 주석재 얼굴 붉어지면 주석재 킥킥대며 웃었다.

내장이 뒤틀려, 숨이 멎어도 주제넘게 굴지 않는 주석재를 밀어낼 명분이 없으므로 하루를, 이틀을, 나날을. 권재형은 권재형대로 살았고, 주석재는 주석재대로 살았다. 주석재를 향하던 열등감도, 권재형을 향하던 증오도 결핍의 형태로 맞물려 돌아갔다,

권재형과 주석재가 쌓아가는 기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채로.
08. 처음






한여름이다. 에어컨 고장에 열어놓은 창문으로 찌르는 매미 소리가 울린다. 소음이 하나가 더 들었다. 경적, 도시 소리. 매미 소리. 여기저기서 보스, 수리기사 언제 옵니까. 라는 항의 소리에 권재형 막내에게 법인카드 쥐어주고, 오늘은 빙수다.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막내는 사명감 넘치는 표정으로 설빙입니까. 텔입니까. 묻는 말에 새끼야, 망고 빙수 비싸다. 하면서 머리 퍽 치니 주변에서 웃음소리 들려왔다.

주석재도 이제는 조직에 섞여 들어 위화감이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권재형이 입히고 꾸민, 주석재. 맞춤 정장에 고가 시계를 찬 주석재는 검소하고 고결해 보이던 경찰 시절에 비해 분위기가 변해있었다. 권재형의 취향으로 꾸며진 주석재. 하나부터 열까지 바꿔도 바뀌지 않는 건 유일한 네 체향인가. 숨을 들이쉰다. 사무실에선 깔끔한 향이 난다. 먼지와 뭉쳐가던 재떨이가 치워졌고 말라 죽어가던 식물은 생기가 돈다. 주석재가 관리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일 찾아 나섰다. 은근히 주석재 무시하며 따돌리던 조직원들도 마음을 열었는지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도 보였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저 왔습니다!!!!” 막내가 우렁차게 외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만 달랑 들고 오기에 의문 담긴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빙수는, 양이 너무 많아 배달시켰습니다.” 헤헤, 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럼 비닐은 뭐야? 물으니 아, 이거는 아이스크림입니다. 하며, 조직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는 게 아닌가. 이 새끼가 법인카드를 마음대로 쓰네. 싶었지만 뭐, 저런 막내 하나 있으니 분위기 환기되고 나쁘지 않지. 아닌가, 기강이 무너지나. 막내는 넉살 좋게 웃으며 권재형에게 더블 비얀코를 건네며 이게 제일 비쌉니다. 소곤거렸고, 옆에 서 있던-이제는 앉을 자리 책상까지 놓아준- 주석재에게 비비빅 건네며, 형님은 고지식한 노잼인간이니까 비비빅입니다. 하며 농담 던졌다. 권재형은 주석재 바라봤다. 막내에게 고맙다고 작게 웃어주는 주석재 보며 따지고 보면 내 카드로 산 건데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정말 생각만 했다.

주석재를 바라보던 권재형에게 비서실장이 다가와 속삭였다. 저번에 그 건, 말입니다. 부산에서 하잡니다. 부산, 바다가 있는 곳. 앞바다 살짝 들어간 골목 횟집 회가 그렇게 맛있던데. 발효주 달달하게 따라서 마시면 목구멍 환해지는 알싸한 단맛. 회와 그렇게 잘 어울려서 부산 가면 꼭 갔었지. 권재형은 책장에 꽂혀있던 노란 서류 다시 꺼내 읽고는 사무실에 외쳤다.

“얘들아! 우리 회 먹으러 가자!”

사무실에 환호 소리가 울렸다. 주석재는 처음 보는 상황에 주변을 살폈다. 권재형이 그런 주석재 보고 씨익 웃더니 주석재 먹던 비비빅 주석재 손잡고 끌어와 와암 하며 뺏어 먹었다. 주석재는 사무실에서 왕따도 당하고 아이스크림도 빼앗겼다. 조직원들은 와하하 웃기만 했다.

신나 하는 이유를 말하자면 길다. 일 때문에 가는 거지만 누가 죽을 위험도, 법적으로 문제도 없는 정말 단순 회의, 미팅이다. 게다가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회를 먹는데 내 돈도 아니다-권재형의 돈이고 따지고 보면 야쿠자 쪽에서 통용되는 돈이니 권재형도 돈이 아깝지 않다- 사무실은 회 먹으러 간다는 생각에 신나있었다. 암묵적 회식이고, 휴가고, 놀러 가는 분위기였다.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러시아에서 늙은이가 오는데, 이 늙은이가 사람을 귀찮게 구는 재주가 있었다. 전국에서 알만한 조직 보스들이 모여서 회의 같은 걸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권재형과 조직원들은 간 김에 휴양이나 하자는 분위기였지만 다른 조직들은 욕이나 하고 있을 터였다.

권재형이나 비서실장이나, 그 외 간부들이나 좀 피곤하고 말지 다른 조직원은 따라가 호위하고 잡일하고, 그 외에 가오 살려주고자 병풍처럼 서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유가 보장됐다. 권재형과 간부들도 한두 시간. 정도 진행되는 회의가 끝나면 자유시간이니 말 그대로 회 먹으러 가는 거다. 삼박 사일 정도. 러시아에서 오는 이 늙은이는 전 세계 무기 시장을 꽉 잡고 있어서 거물 중의 거물이다. 문제가 있다면 하루 두 시간 이상 외국어로 대화하면 통역사가 끼어있어도 피로해 쓰러진다나 뭐라나. 늙은이, 우리가 맞춰줘야지.

주석재가 조직에 들어오고 나선 권재형이 운전하는 날이 많았다. 원래는 수행비서가 재형이 취향에 맞게, 날씨에 맞게 끌고 오는 차 조수석에 탔지만 주석재를 다른 조직원과 단둘이 놓아두기엔 껄끄러워-주석재도, 조직원도, 권재형도- 권재형이 매번 주석재 픽업해 운전했다. 이번 부산 일정도 권재형이 운전하기로 했다. 수행비서는 직접 운전하겠다는 권재형의 말에 장거리 운전하면 피곤하지 않겠냐 걱정해왔지만, 권재형은 주석재랑 데이트할 건데 낄 거냐는 물음으로 대답해 괜한 말을 했다고 걱정을 철회해왔다.

오랜만에 집어 든 빨간 스포츠카의 차 열쇠. 삑, 하며 눈을 열고 운전석에 앉는다. 권재형 검은 민소매 위로 흰 셔츠 걸쳤다. 겨울로 향하는 가을은 아직 더운 감이 없지 않아 있어 권재형 팔 걷어 올린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 매는 주석재 바라보고 페달을 밟는다. 스포츠카에서는 옛날 팝송이 흘러나왔다. 권재형의 취향은 아니고 음악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노래였다. 도시에서 벗어나니 평일 한가한 도로는 탁 트여있었다. 권재형 옆에 앉은 주석재는 어색한지 주절주절 떠들어 왔다.. 그런 주석재의 행동이 귀여워 먼저 화제 꺼내지 않고 대답만 했다. 주석재는 대화를 끌어나갔다. 오늘 날씨 좋네. 라거나 바다 이야기 라거나. 어렸을 적 이야기 등등. 주석재 뒷조사 서류로 이미 알고 있던 내용도 있었지만 처음 듣는 척 그래? 하고 반응했다.

권재형 차들이 지나가지 않는 도로에서 창문 내렸다. 맑은 공기가 차 안으로 훅 들어왔다. 권재형 전부 내려진 창틀에 왼팔 올린다.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한 손으로만 운전하는 권재형. 주석재의 힐끗거리는 시선에 나 운전 가르쳐준 언니가 가르친 습관이야. 하고 말해줬다. 차가 멈출 때면 가끔 담배를 피웠다. 왼손에 끼워진 담배 빨아들이고 틀에 팔을 걸친다. 담배는 항상 입에 물고 운전했었는데, 주석재가 걸어오는 말에 대답해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고속도로 타는 속도에 불이 몇 번 꺼지자 권재형 입에 물었다 깊게 빨아들이고 차 안 재떨이에 꽁초 버렸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에 불었다. 머리가 헝클어져 수시로 넘겨주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몇 시간 운전하고 나서야 바다가 보였다. 장시간 운전에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기미가 보였다. 권재형 옆으로 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권재형은 가을 햇살 및 태양 반사하는 붉은 바다를 힐끗 바라본다. 권재형 운전하던 검지로 운전대 톡톡 치다 묻는다.

“바다 보니까 좋아?”
“좋아, 어렸을 때 아버지랑 갔었어.”

주석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게. 플러팅과 욕설로만 이루어져있는 문장만 내뱉는 권재형을 주석재는 동정했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애정을 모르는 권재형. 사랑도 모르고. 멋대로 휘두르려고만 하는 권재형. 권재형도 기분이 이상했다. 권재형은 주석재가 어려웠다. 단순하게만 살아온 권재형의 삶에 주석재는, 주석재를 생각하면, 어디서부터 생각해야 할지 파악도 안 되기에 어려웠다. 꼭 어렸을 적 펼쳤던 수학책에 공식도 몰라서, 아니, 기호도 몰라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 똑같은 감각이었다.

주석재는 기이한 평안을 불렀다. 이 트여있는 스포츠가 안이 밀폐되어 있는 듯한 기분.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권재형은 바다가 깊은 만큼 넓었으면 좋겠다고 짧게 생각했다. 증오는 희석되고 애정은 남는다. 주석재와 권재형의 미묘한 관계였다. 죽일 듯이 싫어하면서 미칠 듯이 동정하는 이질감. 권재형은 아이러니한 상황에 물었다. 연애 해봤냐. 하고. 주석재는 연애할 시간이 없었다고, 공부만 했다 그런다. 와, 그러면 모솔이야? 권재형의 순수한 감탄에 주석재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처음이란 처음은 다 가져갔네. 첫 키스, 첫 경험. 첫 연애. 아, 연애까지는 아닌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니까. 해가 지며 노을 깔린 도로, 바다. 주석재의 얼굴. 흥분으로 달떠 붉어지는 네 얼굴만큼 붉은 시간. 너도 인생이 기구하다. 그러게 왜 나 같은 거 옆에 있어서 그래. 내뱉지 못 하는 말 생각하고 권재형 픽 웃는다.

“그럼 내가 처음이야?”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네.”

주석재는 창밖 바라본다. 바다가 넓었다. 햇살은 눈이 부셨고, 날이 참 좋았다. 금방 떨어져 버릴 저 해가 언제까지나 떠 있다면 이 평안이 영원하나. 부질없는 생각이었지만. 권재형 기분이 좋아 밖 바라보는 석재 힐끗 보고는 머리 쓰다듬는다.

“너도 사랑은 안 해봤겠네.”
“......그렇지 뭐.”

근데 필요하다고 생각 안 해. 주석재의 짧게 덧붙인 말이 차 안을 헤엄친다.


09. 바다






회의가 끝났다. 미친 늙은이 새끼. 언제 뒤지나. 빠진 이빨들에 새는 발음으로 돌리고 돌려 제영 지부에서 모든 책임을 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제일 어리고 만만해 보이니까 매번 거는 시비다. 열일곱부터 조직 아니면 갈 곳이 없어 피 묻히고 산 권재형 인생에 그렇게 쉽게 꼰 말 못 알아듣겠느냐고. 권재형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면 제정신이십니까. 를 돌려 돌려 말하고, 그렇게 돌림노래 반복하다 두 시간 훅 지나니, 늙은이는 이만, 내일마저 이야기 합세. 하고 자리를 떴다. 다른 보스들은 불똥 튈세라 묵묵하게 시선이나 돌리고 있었다. 비겁하다, 비겁해. 우리는 기껏 해봐야 브로커라니까. 우리가 왜 책임을 져. 미친 새끼들아.

장시간 운전에 늙은이까지 봤더니 기가 쭉 빨렸다. 권재형은 주석재 끌고 방으로 들어온다. 카드키를 꼽는다. 불이 반짝하면서 켜진다. 피곤해. 중얼거리며 주석재 침대에 풀썩 눕혀 그 위로 올라앉았다. 가슴 밑으로 두 근, 두 근.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맥박 소리가 안정적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잠이 몰려올 것만 같았다. 주석재의 씻으라는 말에 권재형 욕실로 들어간다. 주석재의 맥박, 심장.

권재형은 뽀송히 씻고 나와 머리를 말렸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권재형 창밖을 바라본다. 어두워진 하늘 밑에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 위로 촘촘하게 세워진 가로등은 반짝이며 빛났다. 권재형 드라이기 내려놓고 창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밖에 테라스가 있기에 나갈까, 하던 차에 주석재가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욕실에서부터 넘어오는 온기가 맨살에 닿는다. 권재형은 샤워가운 입은 주석재 돌아보고는 묘한 기분에 주석재 가까이 다가간다. 얼마나 더 가까워야 네 맥박 소리 들리나.

석재 샤워가운 앞 리본 만지작거린다. 주석재 올려다보곤 까치발 디뎌 쪽 입 맞췄다. 왜 같은 바디워시를 썼으면서 주석재는 주석재 냄새가 나는 걸까. 주석재는 익숙한 듯 방 불 꿨고 둘은 침대에 풀썩 누웠다. 권재형은 주석재를 내려다봤다. 막 씻고 나와 따끈따끈한 주석재. 흥분한 표정으로 소리 참아 입술 깨문다. 권재형은 피 돌아 붉어진 입술 틈새 손가락 집어넣고는 허리 움직인다. 손 빼내어 혀 섞는다. 목까지 붉어진 주석재가, 시선을 맞춰오는 게. 기분이 묘해서 권재형, 눈을 감았다. 질척임이 길다.

권재형 주석재 이마에 입 맞추고 가운 하나 걸친 채 테라스로 나간다.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 입에 문다. 권재형, 틀에 기댄 채 밖 바라본다. 바다, 넓고 푸른. 밤이라 어두운. 새까만. 바다. 담배 연기 내뱉는다. 기이함이 익숙해지면 평범함의 기준이 변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평범함이, 일상을 깨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선 인생에 스며드는 잔가지들을 적당히 쳐내 줘야 한다.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의식조차 하지 못할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앞에서 새벽까지 진행하는 축제 속 스피커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최근에 개봉해서 흥행한 영화 속 삽입곡이다.

이거 나비가 불렀다고 그랬는데. 어느 날 나비가 나타나서 말했다. 경비도 퇴근한 새벽 사무실 빌딩 앞이었다. 저 첫 상업영화 들어가요. 그래서... 말을 끝맺지 못하길래 권재형은 피식 웃으며 머리 쓰다듬어 줬다. 항상 고맙고, 언제든 연락해. 가로등이 깜빡였다. 그때 나비가 뭐라 말했었지. ...사랑 있잖아요. 그건, 연기할 수 없는 거 같아요. 였던가. 권재형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눈에 비치는 나비의 얼굴 또한 할 말이 많은 표정이라 가볍게 입 맞춰주고 말려고 했다. 나비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권재형 바라봤다. 저 세컨드는 싫어요. 권재형은 팔 뻗어 머리 헝클였다. 깔끔한 작별인사였다. 권재형은 검지로 담배 튕겨 담뱃재 떨어뜨린다. 곧 파도에 노랫소리가 묻혔다. 바람이 불었다. 권재형 맨살로 바닷바람이 스쳤다.

줄담배를 피울 생각은 없었는데 밤에 보는 바다가 생각보다 깊어 시간을 빼앗겼다. 두 개비 다 때워갈 때 쯔음 드르륵 문이 열렸다. 권재형은 주석재 돌아보지도 않고 추우니까 들어가 있어, 금방 들어갈게. 하고 웃는다. 권재형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끈다. 등 뒤로 주석재가 권재형 허리 끌어안았다. 알싸한 니코틴 향과 바디워시에, 차가운 바람 향이 나는 권재형. 권재형은 주석재 돌아본다. 언제 챙겨입었는지 재킷까지 걸쳐입고 셔츠 단추 끝까지 채운 주석재가 보였다. 권재형은 주석재 밑 바라보다 눈 곱게 접어 웃는다.

“많이 늘었네?”

주석재는 권재형을 바라봤다. 침대에 누워있던 주석재가 권재형을 따라 테라스까지 나온 이유. 찬바람 부는 테라스에 서있는 권재형이 추워보여서. 권재형 옆에 있는 재떨이에 담배가 쌓여있었다.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권재형의 웃음소리가 낮게 울린다. 주석재는 생각했다. 아, 나는 너를 잡을 수 없겠구나.

“추워.”

주석재는 안았던 팔에 힘을 주어 더 끌어안았다. 사랑, 주석재도 사랑은 몰랐다. 애초에 사랑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이었다. 부족하지 않았고, 불행하지 않았다. 권재형은 언제나 사랑에 관한 말을 해왔다. 사랑하잖아. 사랑해. 맨살이 닿아 체온을 옮겨도 무미건조한 사랑고백에 감정은 없었다. 권재형의 목소리는 그랬다. 없으니까. 사랑이 없으니 사랑을 말한다. 너는, 주석재는 생각을 이어할 수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묘했고, 기묘했고. 뒤틀린다. 주석재는 권재형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두 근 거리는 맥박 소리가 들려왔다. 파닥이며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심장 소리다. 두 근, 두 근.

권재형은 가끔 주석재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인생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극명한 거부감에 가깝다. 바람맞아 맨살 차가운 권재형, 따뜻한 주석재 체온 빼앗듯 입술 맞춘다. 맥박이 뛰었다.

마지막 날 저녁엔 부산 유명한 횟집 통째로 빌려 회식했다. 아, 오랜만에 막내 건배사 한 번 들어보자. 하는 수행비서의 막역한 제안에 막내는 열정! 열정! 열정! 하며 잔을 부딪쳐 왔다. 대학에 가야 할 놈이 이러고 있으니 모두 동시에 애잔한 감정을 가졌지만, 각자의 사정이란 게 있으니, 말 삼키고 부어라! 마셨다. 술이 술술 들어갔다. 75년 전통의 발효주는 매실 향이 났는데 매실은 아니었다. 사장님한테 뭐가 들어간 술이냐고 물었는데 그건 집안 대대로 데려오는 비밀이라서 말할 수 없다고 완곡한 거절을 당했다. 행동대장이 무식하게 일어나서 겁주려는 듯 협박조로 입을 열기에 권재형, 이 깡패 새끼야, 민간인이다, 하며 머리 퍽 쳤다. 행동대장은 머쓱하게 웃으며 죄송합니다... 하고 조용히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권재형은 사장님께 죄송하다고 사과하고는 방어회 두 접시 더 주문했다. 역시 이 집 술이 최고다. 문득 재료를 알려주지 않는 게 혹시, 마약성 열매가 들어간 건가. 하는 생각 스쳤는데, 한국이 그렇게 마약 강국은 아니지. 생각 날렸다. 마약이라면 이미 우리 조직도 알고 있었을 거다. 마약중독자들은 여기 와서 이 술 좀 마셔야 한다. 마약중독보다는 알코올 중독이 낫지. 이 술 진짜 마약 같아. 아, 알딸딸하네. 한 병만 더 마시자. 짠~! 잔이 울렸다.

주석재는 권재형 옆에 앉아 건배사 외치며 부딪혔던 그 잔, 딱 한 잔 마시고 말았다. 주변에서 재미없는 새끼라는 비난이 들려와도 꿋꿋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권재형은 주석재에게 넘어오는 잔 대신 마시고 새끼들아, 적당히 마셔라, 내일은 출근해야지. 하고 훈수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권재형 바라보며 한숨 쉬곤 적당히 마시라며 권재형 잔 뺏어갔지만, 권재형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죽어라 마시고 결국 흔들리던 머리통 주석재 어깨에 툭 떨어졌다.

권재형의 알코올 냄새가 끼친다. 달큰한 열매로 만든 발효주는 술 냄새보단 달달한 냄새가 났다. 주석재는 술에 쉬해 큰 숨 내쉬는 권재형 보며 한숨 쉬었다. 권재형이 갔다는 건 이 테이블에 있는 사람 모두 전멸했단 뜻이다. 담배 피우러 나간 몇 명이 비틀거리면서 들어왔고 수행비서는 대체로 멀쩡한지 주석재 보며 보스 챙겨 가봐도 좋다고 했다. 서류 사본 만들며 늦게까지 일하던 비서실장도 미련 뚝뚝 남는 얼굴로 술병 바라봤지만, 재형이 조직 규칙- 한 명은 맨정신으로 서류정리 후 뒤처리할 것(가위바위보로 정해진다)-에 의해 패배해서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참치회만 두 접시 주워 먹고 들려오는 수행비서의 목소리에 주석재 바라보며 고개 끄덕였다. 이 꽐라들은 우리가 정리할 테니 들어가 보라고.

주석재는 권재형을 업었다. 권재형은 술기운에 기분이 좋은지 다리를 흔들었다. 주석재 목에 팔 걸고 귓가에 속삭였다. 석재야 우리 바다 보러 가자. 너 바다 좋아한다며. 흘리듯 휘발될 목소리로 바다를 입에 담았다. 주석재는 호텔로 향하던 발걸음 돌려 모래사장을 걸었다. 새벽 바다는 바람이 차가웠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환절기의 애매한 새벽바다. 애매함 그 자체였다. 모두가 잠이 든 짙은 새벽 시간 주석재는 권재형을 업고 다리를 움직였다. 바다에 도착해서 주석재가 권재형을 내려주려 했지만, 권재형, 주석재 목 꼭 끌어안은 채 나 내리지 마, 하고 칭얼댔기에 어쩔 수 없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주석재 구두 밑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진다. 철벅 철벅, 길을 잃지 않게 켜둔 가로등에, 바다 건너편에서 보이는 불빛에, 하늘에 떠 있는 달빛에, 주변이 밝아서 의외로 밤바다가 그렇게 어둡고 무섭지는 않구나. 생각했다. 권재형은 주석재의 등이 좋았다. 따뜻해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남자. 시키는 일이란 일은 모조리 다 하는 남자. 멍청하리만큼 고결해서 짜증 나. 권재형은 주석재 목선 아프지 않게 왕 물었다. 석재가 갑자기 왜 그려냐 물었지만 답해줄 마음은 한 톨도 없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석재는 돌아가자. 라고 말하며 왔던 길을 걸었다. 권재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주석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가만히 있는 권재형이 깨어있는지, 자고 있는지. 서로에게 들리는 조그마한 숨소리 파도 소리에 묻힐세라 귀를 기울인다.

“......나 사랑하지 마.”

권재형이 아주 작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모를 만큼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사랑하지 마. 사랑한다 거짓말하지 말고, 사랑을 연기하지 말고, 노력하지 마. 나 사랑하지 마. 권재형의 말에 주석재가 무어라 대답했는지. 권재형의 의식이 멀어져 듣지 못했다.
10. 과호흡






사무실에서 석재가 하는 일이란 단순했다. 청소하기, 정리하기, 인터넷도 되지 않는 컴퓨터로 지뢰 찾기 하기. 책 읽기. 조직원들과 말 상대해주기. 애초에 주석재는 정식으로 입사한 조직원도 아니었고 일을 시키기엔 너무 정의롭다. 심지어 경찰이었다. 가끔 주석재와 권재형 조직원 모두가 정에 휩쓸려 자신들의 위치와 본분을 망각하고는 했지만 아, 하는 순간이 찾아오고는 했다.

노곤하게 따뜻한 사무실 창밖은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졸음이 밀려와 꾸벅꾸벅 조는 권재형 앞으로 노란 파일 들이민 비서실장은 권재형에게 묻는다. 그런데,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권재형은 파일 열어 서류 정독하곤 깔끔한 싸인 마친다. 권재형은 실장 올려본다. 권재형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비서실정은 권재형이 심부름시켜 막내와 나간 주석재의 빈자리를 눈짓했다. 권재형은 아, 했다.

그러게, 이대로 괜찮나. 솔직히 말하면 권재형. 이대로 괜찮았다. 아니, 나쁘지 않았다. 음, 가끔 묘하고, 기묘한 감각이 들었지만, 권재형은 단순했다. 주석재가 끌어안아 오는 단단함에 좋았고, 맹한 표정이 귀여웠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하는 주석재. 문제도 안 일으키고 조직원들과도 잘 지내니까. 권재형 고개 기울이며 잠시 고민하다 상관없지 않을까. 답했다. 비서실장은 보스가 그렇다면 그런 거죠. 하고 충직하게 답했지만, 권재형 무의식 깊게 정말 이대로 괜찮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막내와 주석재 머리 위에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권재형은 야야, 냉기 들어온다. 문 닫아라. 하며 주석재 머리 위에 쌓은 눈 털어주었다. 손에서 눈이 녹았다. 막내는 저도 예뻐해 주세요. 라고, 머리 숙였다. 권재형은 예쁜 짓을 해야 예뻐하지, 하고 머리 퍽 쳤다. 막내는 꿍얼거리며 주석재와 사 온 군고구마 테이블에 펼쳤다.

꿀고구마 사 오라니까 왜 호박고구마야. 맛없어. 권재형이 투덜댄다. 한번 말할 때 듣는 놈이 없다. 꿀고구마를 사 오라 했으면 꿀고구마를 사 와야지 무슨 호박고구마야. 인생이 뜻대로 되는 게 없네. 이놈이고, 저놈이고. 말을 안 들어... 권재형 그래도 따끈따끈 갓 구운 고구마 잎에 넣고 씹는다. 변명이라도 하라는 듯 막내 뚱하니 바라보니 꿀고구마 사려면 옆 동네까지 가야하고 자기는 운전면허도 없고, 춥고, 형님한테 차 키를 주진 않을 거... 까지 말했다. 말을 멈췄다. 금지어 같은 말이었다. 막내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호박고구마도 맛있다고, 자기 어제 김장 봉사하고 김치 받아왔다고 말하며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다른 조직원들도 와, 막내가 이런 손재주가 있었네. 김치가 아삭하니 죽여준다. 하고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신뢰하지 못하면서 곁에 둔 이 관계는 기이하지. 권재형은 한숨 쉬고 막내 머리 퍽 친다. 도로가 퇴근하는 차들도 꽉 막혔다. 곧 크리스마스라고 거리는 훈훈하게 화려한 이벤트 광고로 넘쳤다. 붉은 리본이 이곳저곳에서 보였고 산타 탈을 쓴 알바생과 led 전구들을 달아놓은 나무들도 보였다. 권재형은 조수석에 앉아있는 주석재 바라본다.

“운전할래?”
“...아까 막내 때문에 하는 소리라면 신경 쓰지 마.”

주석재가 어색하게 웃는다. 권재형은 정제된 차도가 지루했다. 운전대에 엎드려 석재 올려다본다. 석재야. 권재형, 주석재 이름 다정하게 부른다. 석재가 권재형과 눈을 맞춘다. 권재형은 몸을 일으킨다. 석재 목덜미 끌어와 입 맞춘다. 자연스레 벌려주는 혀에 혀 비집어 넣는다. 한 손 석재 허벅지 올려 살살 쓰다듬는다. 권재형은 혀였으며 주석재 귀 만지작거린다. 뒷머리 통 부드럽게 쓸고. 입술을 맞대고. 숨이 차면 입 떼어낸다. 이마 맞대어 눈 마주치다 머리 쓰다듬고 놓아준다.

들어온 오피스텔은 생활감이 넘쳤다. 권재형의 물건들이 있었고, 주석 재의 물건들이 있었다. 한 침대 위엔 두 개의 베개가, 설거지통엔 두 쌍의 식기들이 있었다. 부족하니까, 다 썼으니까, 없으니까 산 물건들.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는데. 이대로 괜찮냐는 말을 듣고 사니 기이했다. 너는, 넌 이대로 괜찮나. 주석재가 차린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는 석재 허리를 끌어안았다. 주석재는 심심하냐 물었다. 밀어내지도 않고 설거지를 계속하는 주석재. 살짝 떨어져 아마도 재형이의 손톱자국이 남았을 등을 검지 세워 쓸었다. 예민한 건지, 쓰라린 건지. 움찔거림이 느껴졌다. 권재형은 주석재 한 번 꼬옥 끌어안았다 놓아주고는 소파에 앉는다. 권재형은 텔레비전을 켜고 설거지하는 주석재 뒷모습을 바라봤다.

경찰, 이었던 주석재. 고결하고, 깨끗한, 긍지 높은 주석재. 문득, 숨이 막혔다. 이렇게 오래 같이 있을 마음 없었어. 적당히 겁 좀 주고, 놀아주고. 그러려고 했지. 심하게 놀렸다 싶으면 다들 꽁지 빠지게 도망쳐서 다시는 권재형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은 애도 있는데. 넌, 왜 내 옆에 있어서 이렇게 추락했어. 주석재가 권재형 옆에 있는 게 과연 괜찮나.

권재형은 소파 위 쿠션 끌어와 안는다. 주석재 향이 났다. 권재형은 발목이 가려워 긁었다. 박혔던 유리 파편이 빠지지 않아 흉이 졌다. 권재형은 발목을 바라봤다. 기이한 평온이 익숙했다. 권재형은, 주석재가 놓았던 반찬을 생각한다. 가볍게 깨져버린 유리그릇 소리를 떠올렸고, 혐오 어린 주석재의 시선을 기억해낸다. 주석재와 권재형의 관계는 약한 지반과 같았다. 아슬아슬한 땅에 돌 하나 세우고, 그 위로 아슬, 아슬. 돌들 세워 쌓는다. 무슨 거창한 소원을 이뤄보겠다고 그렇게 하나씩, 새로운 돌을 쌓을까.

괜찮은데, 괜찮아도 될까. 권재형은 숨이 막혔다. 텔레비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재형은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비였다. 이제는 연락이 오지 않은 나비를 화면으로 보니 기분이 묘하다.

-사람은 살아가야 하잖아요. 과거가 어떻든, 기억을 바탕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억을 바탕으로 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죠?
-음... 그러니까 우리는 흑역사나 성취 경험을 오랫동안 가지고 가는 경향이 있잖아요. 과거의 기억에 너무 오래 머물러 사는 거 같아요. 지우고 싶다거나, 되돌아가고 싶다거나. (웃고) 좋았던 건 좋았던 대로, 나빴던 건 나빴던 대로 지금의 나를 이루는 기억이니까, 오늘을 잘 살아 내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에요.

인터뷰하는지 의자에 앉아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주석재는 설거지를 끝내고 권재형 옆에 앉는다. 권재형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인가 봐. 권재형이 말했다. 주석재는 떨떠름한 반응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권재형과 나비 사이의 관계를 주석재가 전부 알지는 못하는 그 제삼자라는 소외감이었다. 주석재 굳이 티 내지 않고 권재형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그러면 권재형 주석재 머리통 끌어안고 두 눈 맞추었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 웃어준다.

텔레비전에서는 예고편이 흘렀다. 방구석에만 틀어막힌 히키코모리 주인공이 멈춰진 시간 속에서 살다 세상 밖을 나서는 이야기인 듯했다. 진부해 보이는데. 주석재가 먼저 묻는다. 주말엔 영화 보러 갈까. 권재형은 그럴까. 하고 짧게 대답했다. 권재형은 주석재 손잡는다. 잡은 손 마디마디 깍지 껴 잡는다. 손가락 사이 엮는다. 그렇게 손장난을 친다. 주석재의 손은 너무 따뜻하다. 권재형은 숨이 막힐듯한 기이함에 네 품 파고들어 네 체향 폐 속을 채웠다.

영화는 권재형 취향이 아니었다. 한국 정서에 맞는, C제이 냄새나는 영화였다. 한국 상업영화 회사. 적당히 자극적이고, 신파적이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 주인공은 오늘이 며칠인지, 어느 계절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나이만 먹어가다 문득 나간 방 밖은 고요했다. 주인공 그러다 내일이 오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하루가 변하지 않았다. 어제 떴던 달이 또 뜨고, 어제 봤던 텔레비전 프로가 또 방영된다. 어제 흘렀던 뉴스가 또, 똑같은 아나운서가 똑같은 멘트를 친다. 주인공은 변하지 않는 하루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방을 벗어난다. 평생 벗어나지 않았던 방을 하루가 변하지 않는다는 기이함에 안도해 세상에 나온다니. 진부한 성장드라마 영화. 중간에 조금 졸았던 것 같기도 하다.

스크린 가득 채운 영상과 옆에서 느껴지는 주석재의 인기척. 커다란 팝콘 중간에 닿는 주석재의 손가락 건드리는 게 제일 재밌었다. 보라는 영화는 보지 않고 주석재 얼굴 바라보고 있으면 주석재는 눈 마주치고 재미없어? 속삭여왔다. 권재형은 스크린에 시선을 돌렸다.

영화를 보고 나와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일상의 기이함은 가시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네가, 내가 못 먹는 재료와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려서 자연스럽게 메뉴를 시키는 것도. 카페에 가서 항상 먹던 음료를 주문하는 것도 기이하고 기묘했다. 언제 이렇게 익숙해졌지. 소화할 겸 걷는 공원에서 권재형은 주석재 바라본다.

“자기야.”
“응?”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튀어나오는 대답도, 역시 이상하잖아. 우리는 뭔데? 아무것도 아니니까 불쌍한 관계? 권재형은 주석재 바라보며 입꼬리 올려 웃는다. 그냥, 좋아서. 라고 작게 말하곤 권재형은 주석재 손 깍지 끼워 잡고 걸음을 옮겼다. 이 밤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느린 걸음을 걸었다.
11. 공백






주석재를 감시하고 있는 게 우리 조직만이 아니라는 걸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짭새새끼들 어떻게 뒤 조직보다 더 더럽고, 치사하냐. 정보원이 정보원이 붙었습니다. 하고 올리는 보고에 그래서 쥐새끼가 누군데? 물으니 주석재란다. 권재형, 석재가? 이러며 고개 기울이니 아, 그, 경찰 쪽에서 정보원을 붙여 감시 중인 듯합니다. 하고. 보고해왔다. 권재형 오랜만에 푸하하 웃는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지. 이게 기이함의 정체였나. 권재형 검지로 책상 톡톡 친다.

주석재가 경찰을 그만뒀다고 해서 다른 경찰까지 조사를 그만둔 건 아닐 텐데. 정말 멍청했다. 그래서 언제 붙었는데? 물어보니 그, 음. 죄송합니다. 하며 사과 먼저 하고는 석재님 입사하고 일주일쯤 후부터 붙은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지금이 한겨울이고 주석재가 조직에 들어온 건 여름이 되기 시작할 무렵이니 와 이 새끼들 우리를 얼마나 사찰한 거야. 어쩐지. 짭새들 하는 모양새가 고분고분하다 했다. 권재형이 주는 돈은 돈대로 받아 처먹고 약점 될만한 정보란 정보는 모조리 수집하고 있었다. 그 말이지. 권재형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멍청했네. 왜, 놓치고 있었지. 역시 해이해졌던 게 맞다.

결국 권재형 주석재 놓아준다. 죽이지도 않고, 오억쯤 들어있는 통장 손에 쥐여주면서 깔끔하게 잘 살라며 인사 건넸다. 주석재 자리에 있는 짐 깨끗하게 한 상자로 정리해 품에 안겨주었다. 주석재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어리바리하고 있었지만 설명해줄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우리 조직, 가족도 아니었고, 정부 그 정도의 관계였으니 이 정도면 예우를 다해줬다고 생각한다. 권재형 이래저래 귀찮아 대충 정리해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크기도 했다. 오피스텔은 선물로 줬다. 주석재가 원래 쓰던 휴대폰도 돌려주고, 주석재 오피스텔 안에 있던 권재형 짐은 버려달라 통보도 했다. 말씀하게 정리했다. 뿌듯한 권재형.

정리는 빨랐다. 누군가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처럼 착착착. 원래부터 조직의 삶이란 대체 가능한 인력적인 삶이었다. 한 사람 빠져도 다른 사람을 쉽게 메꿀 수 있어야 했고, 생겨버린 빈자리에 공허함을 느끼지 않아 하기. 당연했다. 그렇게 살아야 유지되는 삶이다. 감정적으로 살면 안 돼. 권재형은 주석재 바라보며 붉은 입꼬리 올려 웃는다. 주석재의 대답은 듣지 않았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주석재가 매달리는 행동이라거나 짓는 표정, 건네는 말 같은 거 듣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흘리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듣지 않았다. 권재형 전해야 할 말만 끝마친다. 이게 아침을 먹는 식탁 앞에서였다. 권재형은 젓가락질하며 반찬을 집어 먹다 주석재 바라보며 툭 던졌다.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아”

하고. 권재형은 남은 밥을 묵묵히 먹었다. 흰 쌀밥이 씹혀 목으로 넘어간다. 권재형은 주석재 앞으로 통장 넘겼다. 즐거웠다고 말하고, 네 인생 살라고 해주면서 권재형 밥그릇 설거지통에 넣는다. 재킷 걸치고 구두 신는다. 탁탁, 하며 발목 끼워 넣고 주석재 돌아본다.

“잘살아.”

권재형은 출근해서 보안팀에 주석재 출입 명부 제외하라고 말했고, 주석재 짐 정리하라고 지시했고, 오늘부터 출입 통제시키라 공지했다. 권재형은 주석재로 인해, 아니 권재형이 무방비해 유출된 정보를 파악했다. 대안 가능 시안을 표로 만들었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인쇄해서 서류처리 해놓고, 사인해야 할 문서를 확인해서 사인하고, 해야 할 일들 머릿속에 착착 그리며 회의 일자를 잡는다. 권재형은 사무실에서 살았다. 사무실에서 먹고, 쪽잠을 자고. 씻고. 무서운 속도로 계획한 일들까지 다 끝내고 새벽, 사무실. 권재형은 기지개를 켰다. 블라인드 뒤로 가로등 불빛이 비쳐왔다. 깜빡깜빡. 권재형은 블라인드를 걷고 빌딩을 내려다본다. 차가 지나가지 않는 도로는 조용했다.

권재형은 목을 돌리다 휴대폰을 들었다. 새벽 2시 51분. 심심해서 연락처에 들어간다. 익숙한 주석재의 번호가 보였고, 주석재 이름 밑 문자들에 네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인위적으로 읽지 않고 연락처 쭉 내린다.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권재형, 만날 사람이 없어 조금, 아주 조금, 새벽바람이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재영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는다.

아침에 되니 출근한 사람들도 사무실이 북적였다. 다들 권재형의 눈치를 봤다. 권재형은 눈치 보는 시선들이 따끔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옥상에서 선선한 공기 맞으며 담배나 피워야겠다. 하하, 웃음이 났다. 뭐가 그렇게 어려웠지. 이렇게 단순하고, 깔끔하게 정리되는 일을, 뭘 그렇게 고민하고, 그랬지. 역시 범생이 새끼랑 엮이니까 생각 많음이 옮은 게 문제였다. 이제 눈앞에서 치워버렸으니 됐다. 권재형은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물었다. 빌딩 옥상에 올라와도 맡아지는 매연 냄새. 물탱크에서부터 풍기는 썩은 내. 그래, 이게 권재형의 평범이지.

권재형은 나아가지 못했다. 현재에만 살았다. 발목 족쇄처럼 채워진 죄는 미래로 걷는 권재형 관성으로 끌어당겨 과거로 처박는다. 권재형은 그래서 현재를 산다.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고. 오늘만 산다. 오늘 죽어도, 아무렇지 않아. 권재형의 삶에 끼어든 주석재는 권재형에게 미래를 기다리게 했다. 오늘 저녁에 먹을 식사 메뉴와 주말에 할 일을 고민하게 했으니까. 권재형은 오랜만에 문 담배에 기침이 나왔다.

주석재가 권재형을 찾기에 권재형은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할 일들도 다 끝내버렸겠다 오랜만에 효도나 할까. 몇 년만에 찾은 일본, 집도 한결같았다. 변한 게 없는 익숙함. 권재형은 벚나무 밑에 섰다. 겨울 벚꽂나무 껍질을 만졌다. 봄이면 또 꽃이 피겠지. 집에서 유일하게 시간이 흐르는 존재였다. 권재형은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갔다. 열린 방으로 들어가 엄마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절을 했다. 엄마한테 보고가 올라오기 전에 권재형, 이실직고한다. 짭새에게 정보가 흘렀습니다. 쥐새끼는 처리했다고 뒤탈 없게, 그 죽이면 또 법이니 뭐니 귀찮아지니까 오억쯤 쥐여줘서 헛생각 못하게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고 줄줄 말했다. 엄마는 권재형 웃는 낯으로 바라보며 재형아, 감정은 사람을 현혹해. 라고 말했다. 용서에 가까운 말이다. 다행이다. 이번에는 큰 책임을 지지 않아서. 주석재는 여러모로 위험이 컸다. 경찰도 아니고, 조직원도 아닌 존재가 이 바닥에 발을 들여서 사랑도 아닌, 그래서 얜 뭔데. 싶은 존재감을 띠고 있으니 이게 맞다. 주석재는 주석재 대로 밝고 바른 세상에서 지고지순한 고결한 신념 지키면서 살아야 했다. 권재형, 명심하겠습니다.라 짧게 답했다.

삶도, 죽음도 부질없다. 우리는 하루만 사니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너무 정주고 살면, 쉽게 죽는 게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뼛속까지 절망하게 된다. 죽음은 절망을, 절망은 죽음을 부르게 된다. 그래도 권재형, 권재형이 이끄는 조직, 조직원.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들인지라 피도 눈물도 미래에 두었다. 오늘은 죽지 않았고, 오늘은 울지 않았다. 그게 전부다. 감정을 배제하며 사는 이성이 우리에겐 사랑보다 더 큰 감정이었으니 가족이란 말로도 부족한 끈끈함, 유대관계.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주석재는 다르잖아. 처음부터 엮이면 안 됐어. 권재형이 미쳐 정신을 놓고 있어서, 꼬여버렸지만. 이제부터 정리하면 돼. 정리했으니까 됐어. 권재형은 마루에 앉아 담배 입에 물었다. 이 담배 이름이 뭐지. 일본에서만 나는 담배인데. 엄마 옆에 서 있던 야쿠자에게 뺏어온 담배였다. 맛이 색다르네. 권재형 기침이 나왔다. 담배를 끊었던 건 아닌데, 주석재가 싫어해서, 주석재랑 있다 보면 덜 피게 되니까, 아예 안 피게 되고, 그래서 안 피었던지 좀 되었다. 기침이 나왔다. 권재형 뻐끔, 뻐끔 하얀 연기를 뱉어낸다. 일본도 하늘은 하얗네. 겨울은 추웠다. 권재형은 마루 기둥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재형이가 그만할 때가 됐다고 말했을 때, 주석재도 공감했다. 그만할 때가 됐다. 재형이가 입을 열기 전부터 정리할 생각이 있기는 했다. 구직 신문을 펼쳐본다거나 공인중개 앞을 지나가며 매물을 보기, 막연하기는 했는데 그런데.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될 줄은 몰랐다. 재형이가 통장을 줄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고. 주석재는 돈을 받을 수 없었다. 검은 돈이라서도 권재형이 준 돈이라서도 아니라 댓가없는 돈이라. 주석재는 그런 사람이었다.

복직할 생각은 애저녁에 접었다. 주석재는 이 사람들을 잡을 수가 없다. 주석재의 세상이 의도치 않게 넓어져서 가진 게 없기에 사회에 섞어들어 자신 몫의 삶을 살아내려는 발버둥. 우리의 정의는 공통되어 있기에 살아가기 위한 삶이었다. 주석재가 살고 있던, 주석재의 주변을 이루는 세상은 한없이 선에 가까웠으니까.

권재형이 돌아온 사무실은 여전했다. 한 사람이 빠져도 며칠 조용할 뿐 활기를 되찾는다. 그게 경사든 조사든 여전했다. 권재형이 일주일 정도 일본에 머물고 돌아온 사무실은 어쩐히 침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일들 안 하고 뭐 하냐는 권재형의 물음에 막내가 쭈뼛거리며 답했다. 그... 형님, 계속 찾아왔습니다. 하고. 운을 뗐다. 다들 설설 눈치를 보고 있었다. 권재형은 제대로 듣지 않고 의자에 가서 앉았다. 비서 실장에게 중요한 서류 전달 받는다. 계속 어정쩡하게 서 있는 막내 바라보며 눈짓하자 막내는 띄엄띄엄 말한다.

“새벽부터 새벽까지 있는데... 보스가 들이지 말라 해서 들이지 못하고... 계속 서 있는 거 가라 해도 안 듣고, 밥은 먹는지 매일매일 말라가는 게 거, 참, 보기 거시기 합니다... 아무리 보스라 그래도 갑자기, 설명도 없이 내쫓으시는 건,.. 겨울인데... 너무 가혹하지... 아, 그 아닙니다...”

막내는 말을 줄였다. 권재형과 막내의 대화에 듣지 않는 척 귀를 기울이고 있던 조직원들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권재형은 한숨을 쉰다.

“걔, 짭새였잖아.”
“아무리 그래도 보스 애인 아니었습니까?”

애인? 소리가 난 소파로 시선을 돌렸다. 권재형의 시선에 움찔 떨었지만 피하지 않고 눈 마주쳐왔다. 애인이라니 웃기네. 석재와 내 관계를 애인으로 정리하다니. 권재형은 픽 웃었다.

“내가 애인 같은 거 만든 적이 있냐. 일이나 해.”

사무실에 앉았다. 책상도 사라져버린 주석재 자리 시선 두었다 서류를 바라본다. 막내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권재형 앞에 서성이길래 권재형은 미간 찌푸리며 눈 마주쳤다. 막내는 시선 피하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랑했던 거 아닌가요?”

권재형은 헛웃음 새었다, 사랑. 권재형은 입술 삐뚜름하게 올려 웃었다. 권재형은 법인카드 꺼내 막내에게 건넸다.

“중화반점. 짜장 여섯, 짬뽕 넷, 탕수육 다섯. 볶음밥 둘. 요즘은 배달비 붙으니까 직접 가져와.”
“......중화반점이면 옆 동네 언덕 넘어 끝에 있잖아요. 보스으...”
“한 시간 내로 세팅.“

막내가 투덜대며 사무실을 나간다. 너무하지 않냐는 시선이 쏟아졌지만, 권재형과 눈이 마주치자 불똥이라도 튈세라 인위적으로 시선 피했다. 꼬맹이가 사랑을 뭘 안다고 사랑 타령이야. 권재형은 창밖을 바라봤다. 빌딩 밑으로 주석재가 보였다. 권재형은 경호원을 시켜 주석재 쫓아내고 나무젓가락 쪼갠다. 중간에 툭 끊어져 버린 나무에 거, 나쁜 짓하니까 그런 겁니다. 한소리 던지는 조직원 머리 퍽 치고는 젓가락 뺏어 짜장면 비벼 먹었다.

주석재는 쫓겨나고 쫓겨나도 권재형 만나려고 노력했다. 왜냐고 물으니 큰돈은 받을 수 없다고, 건너 들었다.. 웃긴 새끼. 가진 것도 업고 갈 곳도 없으면서 꾸역꾸역 내가 준 돈은 받기 싫다는 건가. 입고 있는 옷도, 차고 다니는 시계도 다 더러운 돈으로 산 건대. . 권재형은 주석재에게 감시를 붙였다. 멀쩡하게 한 번이라도 돈을 쓰면 속 시원하게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주석재는, 정말. 밥 사 먹을 돈도 없으면서, 통장에 손을 대지 않았다. 비굴하리만큼 고결한 인간이었다. 권재형은 신경쓰이는 주석재한테 짜증이나 결국 빌딩 앞 카페로 불렀다.

권재형은 팔짱 낀 채 주석재 바라본다. 살이 빠졌는지 인상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러게, 밥 좀 먹고 다니지. 반찬은 잘만 해 먹으면서 밥은 왜 안 먹고 다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권재형은 받을 수 없는 백오십 개의 이유를 덧붙이며 통장을 건네는 주석재의 말 끊고 입을 열었다.

“그거 화대인데, 혹시 부족해서 그래?”

정떨어질 말. 주석재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카페의 은은한 노랫소리가 감미롭게 들렸다.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운지 부드럽게 떠드는 소리로 매장이 가득 찼다. 권재형 검지손가락으로 제 팔 톡톡 치고 있으니 주석재 무겁게 입 연다.

“,,,이런 더러운 돈 안 받아.”

하, 진짜 짜증 나는 새끼. 지가 세상에서 세일 깨끗하고 고결하지. 권재형 지친 표정으로 웃는다. 그럼 그래. 버리든 기부하든 네가 알아서 해. 권재형이 먼저 일어났다. 후에 주석재가 어떻게 살든 권재형의 알 바는 아니다. 굶든지, 뒤지든지, 알아서 살라지.

주석재는, 처음부터 권재형과 어울리지 않았다. 애인마냥 들러붙었던 것도 목적, 목표, 결국 추구하는 바가 있었던 거잖아. 감정은 사람을 현혹한다. 감정이라는 허울에 한눈팔려 목적을 잊고 그저 사랑 타령을 하며 서로의 곁을 지키는 우리는 무슨 사이야? 권재형의 삶은 권재형스러웠다. 발밑 아래 있던 애들도, 확장되는 세력도 다 의미가 없는걸.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거짓된 사랑을 속삭여주면서 나날을 보내도 정말 권태롭지. 사랑이 뭐냐는 해답을 찾기 전에 권재형 애정이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했다. 관계에 이름을 붙이면 뭐라도 달라질까.

권재형은 웃었다. 또, 아이러니함. 누가 주문했는지 모를 자연스럽게 주문한, 주로 먹던, 음료들.

다음날 조직 앞에 놓여있는 통장을 봤을 때는 권재형 배꼽 빠지게 웃었다. 빌딩이 떠나가라 실성에 가까운 웃음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어이가 없네. 추적할까요? 묻는 비서실장에게 됐다는 듯 손만 젓는다. 이상한 새끼.

...

삶에 권태가 깃든다.
아이러니함이 쌓인다.
기이한 삶은.
온기에 방향을 잃는다.
12. 삶






만난 애들도 없어서, 권재형은 정말 만날 사람이 없었다. 주석재가 있다고 주석재랑 놀면 되니까 굳이 다른 사람 만날 생각을 안 했다.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생소한 충격이었다. 짭새한테 눈이 팔려있었다니. 주석재가 스파이였다면 조직 대차게 말아먹었겠는 걸. 권재형은 오랜만에 집에 들어갔다. 먼지가 가득쌓인 현관 지나서 먼지 소복한 침대 위에 풀썩 눕는다. 기침이 나와 담배를 문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담배를 문 채 천장을 바라본다. 천장 구석에 곰팡이가 피어있다.

허기가 져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 냉장고를 여니 곰팡이 핀 음식들이 보며 문을 닫았다. 천장을 열어 인스턴트 식품을 살핀다. 참치 한 캔과 햇반 하나 꺼내곤 돌리지도 않은 차가운 밥 떠 입에 넣는다. 낱낱개의 밥알이 입안에 씹힌다. 염분 가득한 기름진 참치가 입 안에서 짭짤하게 퍼져 밥 한 번 더 퍼 입 안에 넣었다.

권재형 앞에 젖살도 남아있을 것 같은 경찰복을 입은 형사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권재형 앞 막아 셨다. 얘는 또 뭐야? 보아하니, 또, 월례행사처처럼 새로 부임한 앤가 보다. 권재형 입꼬리 올려 웃고 가볍게 겁준다. 그러니, 음, 정말 겁먹고 그만두네. 이게 정상이지. 픽 웃는다. 주석재가 이상한 새끼지.

긴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건, 없는 대로 사는데. 있다 없는 건. 허전함이 크다. 주석재가 사라진 사무실은 전보다 넓었다. 말실수를 지우기 힘들었다. 석재랑 어디 가라, 형님이랑 가겠습니다. 같은 말실수부터 하나 더 사버린 간식이나 음식 같은 거. 조직원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두의 실수들이 쌓여갔다. 그러니 정을 왜 줘, 처음부터 섞이지 못할 사람이었잖아. 우리 같은 사람이 민간인이랑 섞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권재형은 항상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민간인, 일반인, 새끼들아. 착하게 좀 살아. 하고. 사람은 다 착하게 살고 싶어. 태어나길 죄로 태어나는 사람이 어딨어.-권재형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크리스천인 조직원도 있지만-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동료의 손에 묻는 피에 대한 위로이자. 살아가는 삶에 대한 마음가짐. 모두가 주석재를 없었던 사람으로 취급했다. 권재형은 주석재를 만나기 전의 삶을 되찾았다.

외롭긴 한데 사람으로 채우면 됐다. 근데 그마저도 그만뒀다.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인생이 권태롭다. 삶이 반복된다. 오늘은 아무것도 없는 꿈을 꿨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존재도, 감정도.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 가까운 꿈. 권재형은 숨이 막혔다. 권재형은 열입곱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다. 통장에 사용하지 않는 돈이 많이 쌓여 국세청에서 확인차 전화가 온 탓이다. 권재형은 흰머리가 자란, 주름진 아버지를 바라봤다. 제영시의 작은 짜장면집은 권재형과 아버지 뿐이었다. 조용한 식당에서 덜그럭거리는 식기 소리만 들려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엄했다. 하나뿐인 딸년이 얼굴도 안 보여주고 자랐다고. 불효라고 욕했다. 권재형은 그런 아빠 앞으로 통장 밀어 건넸다. 아빠는 권재형의 얼굴을 한참 동안 보다 물었다.

“밥은 잘 먹고 다녔냐.”

권재형은 입꼬리 올려 웃으며 가볍게 고개 끄덕였다.

“보다시피요.”

아빠는 통장 받지도 않고 돌려주었다.

“건강하면 됐다.”

아빠는 더 묻지도, 가르치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는 카운터에 지폐 두 장 올려놓고 가게에서 나갔다. 권재형은 아빠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만나자는 권재형의 연락에 주소만 덩그러니 보내온 아빠. 통장은 받지도 않고 꼬깃꼬깃한 지폐 두 장 카운터에 올려놓고 떠나는 뒷모습. 권재형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사장님이 권재형 가까이 다가와 손님, 물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물었을 때에야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권재형은 여전히 사랑을 알지 못했다. 애인이나 좋아하는 사람, 을 둔 그런 사랑 말고도 사랑을 알지 못했다. 권재형은 심장께가 간지러웠다. 두 근, 거리는 맥박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일만 하는 권재형 걱정하며 법인카드로 오늘 커피는 피로해소제라며 돌리는 막내도 웃기고, 마침 필요했다며 꼴깍꼴깍 마시는 조직원들도 이상했다. 10년은 넘은, 어린 권재형의 입맛을 기억하는 아빠나, 아무 말 없이 수고했다며 권재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엄마 같은 거.

가끔. 아주 가끔은 주석재를 생각했다. 복직할 수도 있으며 서로 돌아가지 않은 주석재.

권재형은 일만 했다. 야근할 필요도 없는데 자처했다. 눈 밑 다크서클이 진해져도 힘들지 않았다. 살면서 이렇게 능률이 높았던 적이 있었나. 권재형은 모두가 떠난 사무실에서 미간 꾹꾹 누른다. 밖이 어둡다. 깜빡이지 않은 가로등 내려다본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다. 공기가 텁텁했다. 처리했던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책장정리도 한 번 했다. 그래도 해가 뜨지 않았기에 스트레칭도 했다. 새벽 6시 막내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막내는 겁에 질린 모습으로 귀... 귀신입니까...? 묻기에 내가 귀신으로 보이냐. 하면서 머리 한 대 쳐줬다.

권재형은 오랜만에 집에 갔다. 피어있던 곰팡이는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바닥에는 먼지가 굳어 먼지 뭉치가 굴러다녔다. 권재형은 짧은 탄식 뱉고 다시 문을 닫았다. 저 상태는 권재형의 능력으로 청소가 불가능했다. 권재형은 차로 돌아와 조수석 끝까지 눕혔다. 차에서 쪽잠 좀 자다 사무실 돌아와 씻었다. 3년이 지났다.

겨울로 넘어가는 가을이었다. 업무를 보고 있는 재형이 옆으로 비서실장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 건, 말입니다. 부산에서 하잡니다. 권재형은 사무실에서 외쳤다.

“얘들아! 회 먹으러 가자!”

환호 소리가 울렸다. 부산은 3년 만이었다. 올 일이 없었다. 권재형은 수행비서가 운전하는 검은 세단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는다. 수행비서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라며 운을 떼왔고 조수석에 앉아있던 비서실장은 저 이번에는 가위바위보 안 질 겁니다.라며 결연하게 말했다. 권재형은 감은 눈 뜨지 않고, 나 안마신다. 편하게 놀아라. 말했다. 보스가 웬일이랍니까. 해가 서쪽에서 떴나. 나중에 말 바꾸지 마십시오 등 앞좌석에서 말들이 건너왔다. 권재형이 그냥 가위바위보 할까? 묻자 잠잠해졌다.

회의가 끝난 마지막 날이 되었다. 권재형은 부산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진 탓이었다. 날마다 수면 부족으로 쪽잠만 자며 일했더니 한계가 온 모양이다. 정말 혼자 괜찮겠냐는 물음들에 너네나 잘하라고 일축하고 권재형 호텔 들어와 종일 잤다. 그동안 미뤄뒀던 피로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하루를 내리 자고 나서야 새벽에 눈을 떴다. 일도 가져오지 않아 권재형은 할 일이 없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새벽 방송은 성인을 위한 방송이나 옛날 드라마, 예능 재방송만 나오지, 흥미를 끌 만한 채널은 없었다. 권재형은 차키를 챙겨 텔을 나왔다. 드라이브나 하고 들어가자. 권재형은 차 가는 대로 운전했다. 얼마나 달렸는지, 길을 잃어 차에서 내렸다.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권재형의 시야에 부두가 보였다. 권재형은 부두 길 따라 걸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바다는 건너편에 건물이 보이는데, 배가 정박하는 부두가 있는 바다는 탁 드려 수평선만이 보인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외진 곳이라 그런가 어르신들 몇몇, 일하는 사람 소수를 제외하곤 보이지 않는다. 권재형은 폐 속 끝까지 숨을 들이쉬었다. 짭짤한 비린내가 났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이슬이 차는지 기침이 나왔다. 권재형 두어 번 콜록대고 다시 걸었다. 아스팔트 바닥이 서그럭거렸다. 권재형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걷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발을 멈췄다. 익숙한 인영이었다. 권재형은 어스름한 새벽길 위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시간이 멈췄다. 바람이 불어와 권재형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남자가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

권재형은 눈을 깜빡였다. 멈추었던 발걸음 느릿느릿 걸어 남자 옆으로 다가갔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지내.”
“전남친 같은 멘트네. 똑같이 지냈지.”
“그래”
“...”
“......”
“...”
“나도 잘 지내지.”

안 궁금하겠지만. 덧붙였다. 바다 바람은 차갑다.
권재형은 바람에 눈시려 눈 찌푸렸다. 코 훌적이고 남자 바라보며 웃는다.

“너 안 궁금한 이야기 잘하잖아.”

그랬었는데, 오늘 뭐 했는지 막 말하고, 어렸을 때 바다 갔던 이야기도 해주고.
권재형 갈매기 날아가는 모습 바라본다. 끼룩, 끼룩, 다음에 올 때는 새우깡 들고 와야겠다.

“내가 그랬나.”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 복직은 안 했어.”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점점 밝아졌다. 남자는 주절주절 공백을 채우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목소리에 권재형은 느릿하게 대답하며 반응했다. 이런저런 일 하고 있다며 돈 모으고 있다고 말하며 눈치 보는 남자. 여전히 착해 빠진 것 같아 권재형은 가볍게 웃었다.

“애인은 사겼어?”
“아니...”

권재형은 남자를 바라봤다.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이 첫사랑이라던데, 첫 연애는 다른 사람이랑 해야지ㅋㅋ”

농담조로 말했다. 첫 키스도, 첫 경험도 나랑 했으니까. 다른 건 너 위해 다른 사람이랑 해. 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랑. 그 마음 담아 웃는다. 남자를 바라보지 못했다. 바람이 눈을 말려서 눈을 감았다. 감은 눈은 쌓인 피로에 쉬이 떠지지 않았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파도가 치고 갈매기가 울었다.

“......너랑 한 게 첫 연애 아닌가...”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사귀진 않았는데?”

권재형은 침묵했다. 눈커풀 위로 햇빛이 새어들어와 눈을 떴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권재형은 피식 웃었다. 사람은 살아가야 했다. 과거가 어떻든, 기억을 바탕으로. 권재형이 아무리 주석재를 지우고 없었던 듯 굴어도 주석재와 함께했던 시간과 기억은 지우지 못했다. 권재형이 가질 수 있는 것. 기분, 흉내. 보이지 않는 말까지. 모두 네가 있어서, 권재형 잃어버렸던, 숨 들이쉰다.

“집에 가자.”

권재형이 내민 손 주석재가 잡았다. 온기가 섞인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주황빛으로 물든 세상은 깨어나는 사람들로 북적여지고 있었다. 권재형은 주석재 손 마디마디, 깍지 끼어 잡는다.

권재형을 살아가게 하는 것.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숨, 뇌, 심장. 숨이 멈춰 피가 돌지 않아 뇌정지에 심장이 멈추면 사람은 죽고. 권재형의 숨은 주석재로 멈춰 네 호흡에 숨쉰다. 삶과 비슷한 죽음. 산소 부족에 널 찾는 공백. 다 부질없다. 죄에 대한 감각도 무뎌져서 그저 살아갈 뿐인 권재형.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직면하기. 공포 따윈 모르는 척 눈 감은채 방파재에 밀려오는 파도에 깎여나가도 티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버티기. 서로와 닮으면서도 다른 비슷한 온기를 가진 서로, 고결하고 긍지 높은 너. 바보 같은 주석재. 멍청한 새끼. 권재형의 결핍과 정반대의 삶, 주석재. 정반대 권재형.

지구에서 가장 멀리 있기에, 등이 맞닿았다. 권재형 태양을 등지고 눈꼬리 휘어 웃는다.

다들 너 기다려.
















숨, 뇌, 심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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