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모저모/YIS

박민영

인수는 박민영을 몰라. 열일곱 유인수는 철이 없었고 어른이 되어버린 스물일곱 유인수는 다른 사람을 알기엔 자신조차 모르니 알 턱이 있나. 바보 같고 한심하게 짝이 없는 박민영. 유인수는 박민영을 좋아할 수 없었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복잡하게 생각하는 유인수는 박민영을 좋다. 싫다. 한가지 단어로 대할 수 없었다.

 

바보 같고 멍청하게 짝이 없이 사랑한다고 달큰한 말을 꺼내는 사람이라니. 세상에 사랑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니. 그렇다고 디즈니 동화적인 낭만적인 사랑도 아니잖아. 단순히 듣기 좋은 말들. 입바른 말들. 한순간의 분위기에 눈이 멀어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현재만이 유일할 거라 생각하는 꼴이잖아. 나는, 나는.

 

악의적인 유인수의 마음들. 유인수가 마음 편히, 흘러가는 분위기에 취해 살았을 때가 언제였다. 친구들과 공기놀이하며 깔깔대던 3학년 2반 초등학교 교실? 사실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반짝이며 이야기하던 열다섯 교생으로 온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서툰 연기를 끝낸 무대를 내려와 소주인 듯 사이다를 건배했던 고등학교 연극동아리 뒤풀이 자리에서? 대학생 때만 해도 순수했었나. 연기를 하겠다고. 연극동아리에 들어가서. 가끔 이유 없이 미움받게 되는, 오해와 오해가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힘들었지만 결국 분위기에 취해서. 시간과 체력을 갈아 넣은 만큼 웃음이 나오던 순간들. 돈이나 금전이나. 경제적이나. 앞으로의 미래 같은 건 오지 않을 것 같은. 어른이고 성인이고.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자각이 없던 철없을 그 시절. 옛 기억을 복기했다.

 

자라나는 시간이 쌓일수록 사람은 복잡해진다. 쉽게 내뱉는 말도. 언젠가는 그 뜻이 변하기도 하니까. 나의 행동이 어디서 어떻게 해석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내 선택이 미래를 바꾸니까. 사람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지.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고, 생각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치지. 유인수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들이마신다. 유인수는 유인수 앞에 놓인 시간을 견뎌내느라 다른 사람을 볼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하기로 한 유인수 본인의 결정이라 그 선택으로 인해 포기해야 할 것들도 충분히 고려하고 감당할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순위가 정해진 삶이다. 그리고 그 순위에 연애는 한참 밑에 있고.

 

민영과 연애를 시작했다. 저렇게 가벼운 인간이라면 쉽게 질려서, 혹은 유인수가 너무 바쁜 나머지, 잘 못 챙겨주는 연인을 향한 외로움에 금방, 이별을 선언할 거라 생각했다. 인수도 민영이 싫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 기억인가. 민영은 선배 같았고, 꽤 순수하게 같이 놓았었는데. 그때는 멋있어 보이기도 했어. 조금 설레었을지도. 그래서, 다시 만난 박민영을 고3 박민영에게 겹쳐봤을지도. 막상 어른이 된 박민영은, 뭐랄까. 기억이랑은 좀 달랐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가벼워. 그러면서도 꿋꿋이 저를 애 취급하고. 한심하게 짝이 없으면서 자존심은 세지. 악의 섞인 마음들이, 그러니까 자기 혐오적인 생각이 치고 올라오면 유인수는 무너지곤 했다. 이런 감정들은 박민영을 향한 게 아니라 유인수, 본인을 향한 거였으니까. 그래서, 그렇기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짧게 만날 관계. 적당히 사귀다가 전처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등학교 옛 시절 기억을 공유하는 동창으로 남는 것도 좋지.

 

민영과의 연애가 길어질수록 인수는, 유인수는 숨이 찼다. 박민영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왔고. 왜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사람이 왜, 가벼워졌는지. 그냥, 박민영이 인수에게 주는 애정에 인수는 버거웠다. 인수가 연애와 일을 병행할 수 있을까. 일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욕심 많은 유인수가 박민영의 가늠되지 않는 애정을 온전히 돌려줄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런 유인수를 알면서도 옆에 있는 박민영을 마주하면 인수는 다시 한번 넘실거리는 애정에, 심장 빠듯이 가득 차는 감정이 버거웠다. 인수는 박민영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쉽고 가벼워. 날 선 말, 네게 내뱉지는 못하고 결국은 바보. 한마디 당신에게 건넨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인수는 생각했다. 민영이 내뱉어주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제가 내뱉는 좋아한다는 말이랑 온도가 비슷할 거라고. 어쩌면, 자기가 더 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그런 건 다가올 이별을 생각하면 비참해질 것 같아서 딱 이 정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가올 이별은 인수가 정하는 건 아니었다. 무릇 평범한 연인들이 그렇듯이 성격 차이. 상황 문제. 여러 가지 기타 등등의 이유로 헤어지겠지. 인수는 바쁜 사람이었고 민영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니까. 조금 당연하잖아.

 

칭찬은 아닌데... 그래서 좋아요.”

 

좋아한다는 말이 괜히 부끄러워 네 품에 안겼다. 네 허리 꼭 끌어안았다. 네 온기가 따뜻해서 심장이 뛰었고, 미안했으며, 불안했다. 그래서, 네 단순함이 부러워. 막상, 선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걸. 알고 있지만. 이게 문제지. 당신을 알아간다는 건.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늘어가는 거니까.

'이모저모 > Y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04. 부재  (0) 2022.09.04
03. 금연  (0) 2022.08.31
[조민경인] 02. 친구  (0) 2022.07.27
[조민경인] 01. 공사  (0) 2022.07.26
[박민영X유인수] Parade  (0) 2022.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