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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01. 며칠만 재워주세요.(공포 4,481자)

비가 떨어진다. 창문을 매섭게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가 말소리를 좀먹는다. 가득 보이는 시야가 금빛으로 차올라서 눈이 먼다. 사랑 같은 건 하지 않겠다며 다짐하던 이날 밤에. 치기 어렸던 순수함으로 내뱉던 독기 어린 다짐은 네 품에 무너졌다.

 

손바닥을 그었다. 서로의 생명을 엮어서 계약을 맺었다.

네가 갖고 싶던 내, 염원이 허황된 바람이라면.

내가 가진 이, 감정도 헛될까.

 

 

**

 

 

어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

 

 

비가 오면, 너도 올까.

 

 

 

 

 

 

01. 며칠만 재워주세요.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며 밟혔다. 하늘하늘한 옷이 나뭇가지에 찢기고 얇은 단화가 벗겨져 발에 상처가 났다. 아직 박히지 않은 굳은살은 여린 살에 물집 잡혀 걸을 때마다 발목이 꺾이는 통증이 일었다. 달달한 분내에 벌레들이 꼬였다. 붉게 칠했던 뺨은 추위에 코까지 붉어져 갔다. 애써 올린 머리는 헝클어 헤진다. 갓 성년이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소녀라고 불리어도 될 듯 여린 티가 나는 이 아이가, 달이 휘영청 뜬 한밤중에 등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험난한 산을 오르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 단 하나뿐이다.

 

신성에 가까운 새하얀 옷에 나뭇잎이 붙었다. 옷에 묻은 검댕을 떨어내지도 못하고 걷는다.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어디선가 들짐승이라도 튀어나올까 단도를 꼭 잡고 앞길을 헤쳤다. 죽지 않기 위해 사는 삶. 오늘 밤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숨을 쉰다. 들짐승들에게 물리지 않고 살아남기를, 멀리멀리 도망쳐 살아갈 수 있기를. 옷이 넝마가 되고 피가 굳어 피부와 옷이 붙는다. 미처 굳지 못한 피가 흘러도 멈출 수가 없었다. 산짐승과 맞닥뜨려 내가 이길 확률은 드무니, 몸을 숨길만한, 불을 지필 수 있는 곳이라도 찾아야 했다.

 

가진 것도 빼앗긴 채 내쫓겨 나왔다. 가진 거라곤 손수건, , 팔랑거리는 옷. 지긋지긋한 분 냄새. 몰래 숨겨온 단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나 인생의 전환점을 떠올리기엔 소녀는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므로 겁에 먹어 인생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걷고, 뛴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절대 죽지 않을 거야. 인기척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확인도 하지 않고 달렸다. 숲속 깊숙하게 미친 듯이 달리고 달렸다. 한참을 달려 걸음을 멈췄다. 숨을 헐떡이면 힘겹게 뱉어지는 숨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계를 느끼며 숨을 몰아쉰다. 산속 공기는 맑았다. 맑디맑아 폐가 쓰라렸다. 올려다본 하늘은 별이 빼곡하게 떠 있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감는다. 소녀는 깊은숨을 들이쉰다. 명상에 가까운 호흡.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올라갔는지, 내려갔는지. 몇 번의 언덕을 지나쳐 멀리 조그만 빛이 보였다. 소녀는 천천히 빛이 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저택에서 새는 빛이었다. 누가 사는 걸까? 귀족의 별장? 그렇다기엔 성이라 할 정도로 으리으리하고, 관리가 되어있지 않았다. 정문 하늘엔 까마귀가 날아다닌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와 벽돌 사이사이 이끼 낀 틈새는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밤에 우는 벌레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등 뒤를 쫓아왔다.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만이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저택 커다란 문 앞에 섰다.

 

똑똑. 가볍게 노크했다. 텅 비어있기라도 하는지 소녀가 두드렸던 소리가 내부에서 울리는 듯했다. 몇 번 더 두드려도 돌아오는 건 정적이라 문을 열고 들어선다. 육중한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천천히 발을 들여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열기가 뺨을 감쌌다. 높은 천장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아름답게 빛났다. 거대한 홀, 긴 계단.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소녀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인도 보이지 않은 넓은 저택을 멋대로 돌아다닐 정도로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홀 한가운데 서 있는 소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누구 계세요?”

 

허기에 쉰 소리가 났다.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밥을 얻어먹고, 며칠 지내게 해달라 부탁해야지. 불이 켜져 있는 내부로 봐선 사람이 없을 리가 없어. 그래도 부디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 주인이었으면 좋겠다. 사용인들도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 홀로 있는 저택. 어울리는 단어들의 문장은 아니다. 불안감이 들 정도로 아이러니했다. 소녀는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나가는 게 좋을까. 살기 위해 지나온 이 저택의 문이 죽음으로 향하는 문이었으면 어떡하지. 하고.

 

그때 2층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경계심을 갖고 발걸음 소리가 나는 곳을 응시했다.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봤을 땐 꿈인가 했다. 높은 계단에서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여자의 얼굴은 샹들리에 빛에 반사되듯 잘 보이지 않았다. 한 계단, 한 계단, 가까워질수록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누구라도 한눈에 반할 것 같이 아스라한 여자. 소녀는 여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경계심이 풀어질 만큼, 동시에 이질감을 가질 만큼 눈이 부신 사람. 멀리서도 보이는 화려한 은발의 긴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여자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여자가 말을 걸기 전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구?”

 

여자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낮은 톤에 차가운 목소리는 사람이 내는 음성이 아닌듯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쁘지. 여기서 혼자 사는 건가? 저런 외모가 존재할 수 있나? 목소리도 예뻐. 어떡해. 나 죽은 건가. 천사인가? 주접에 가까운 생각이 이어졌다. 사람이라기엔 너무 비이상적으로 아름답지 않나. 이 세상 모든 미를 표현하는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부족했다. 소녀가 입고 있는 새하얀 옷에 신성하게 꾸민 껍데기를 뒤집어씌웠대도 따라 할 수 없는 고결함이 있었다.

 

길을 잃었니? 아니면 사람이 아닌 거야?”

?”

아 사람이네, 귀신인 줄 알았지. 나 귀신은 좀 무서워

 

여자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 먼저 하며 소녀를 이끌었다. 어안이 벙벙해 여자를 따랐다. 모든 게 짜인 듯 희극적인 상황 속 자연스러운 행동에 이질감을 알아채지 못하고 식당에 들어갔다. 거대한 저택, 화려한 주방에 요리. 혼자 먹기엔 과한 양의 음식들이 있었다. 누굴까. 이 집에 사람이 더 있는 걸까?

 

사람은 없어. 여기 있는 건 나뿐이야.”

 

여자가 소녀에게 의자를 빼내어 주며 말했다. 소녀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라며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웃으며 들라고 했다. 음식을 바라본다. 혼자서 먹기엔 물론이고 둘이서 먹기도 많은 양이다. 7~8인분쯤 되어 보이는 음식량을 바라보며 쉽사리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분한 호의와 아름다운 여자, 화려한 음식들이었다. 정답 같은 행동을 찾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소녀는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 내 생일이거든. 그래서 요리해봤어. 먹어주는 사람도, 축하해주는 사람도 없겠지만. 오늘은 혼자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입맛 없으면 안 먹어도 돼. 그냥 있어 줄래?”

 

쉽사리 거절할 수가 없어 느릿하게 포크를 들었다. 이상한 여자였다. 외모도, 거주지도, 행동도. 사람은 쉽게 죽는다. 위태로운 삶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은 어느 순간 훅 가버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음식을 잘라 조금 입에 넣었다. 이상한 걸 타진 않았겠지. 의심하고 조그만 조각을 입에 넣어 우물거렸다. 적절한 간에 혀에 닿는 음식은 허기를 불러왔다. 장시간 공복에도 위가 음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느새 독이나 여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눈앞의 음식을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난 후에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여자의 표정에 낭패감이 어렸으나 맛은 있었으니 어색하게 입을 닦고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식사 맛있네요.”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지.”

 

그 후는 침묵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분위기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을 때쯤 여전히 싱긋거리며 웃는 여자를 보며 말을 걸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요?”

네가 말하지 않으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먼저 물어봐도 돼요?“

.“

누구세요?“

"글쎄... 이 집 주인?”

 

맞는 말이지. 너는 할 말이 없었다. 누구세요라 물은 질문이 잘못되었나. 내 통성명부터 했어야 했나. 영양가 없는 대화를 끝으로 소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떨군다.

 

“......며칠만 재워주세요.”

 

고민하는 듯 여자의 미간이 예술적으로 찌푸려졌다. 조각상 같네. 소녀는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감상에 가깝겠지만 여자는 생각에 빠진 탓에 소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자는 소녀 형색을 훑어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엉겨 붙은 머리, 찢어진 옷, 몸 곳곳에 난 상처 내가 봐도 비루하고 처량하여 함부로 쫓아낼 수 없는 모습일 테지.

 

오래는 안돼. 며칠, 상처가 다 나으면 돌아가렴.”

 

이상한 여자였다. 정체도 모르는 여자를 집에 들여준 다정하고 아름다운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