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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04. 나의 이유 (4,500자)

여자는 생각했다. 이 넓은 저택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눈을 감으면 밤이었고, 뜨면 아침이었다. 시간을 세지 않은 이후로는 하루하루에 계절이 바뀌었다. 어느덧 여자는 마지막을 생각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생일을 지나오면서 남은 건 공허였다. 내가 올해 몇 살이지?

 

매년 같은 날 다락방의 종소리가 울렸다. 생일이었다. 커다란 저택에 사람은 여자 혼자뿐이었다. 커다란 저택을 관리하기 위해 할 일은 많았지만 하나하나 다 챙길 필요는 없어서 마력으로 해결하거나 포기하다 보니 할 일이 없었다. 여자가 하는 일은 가끔 산책하기, 가끔 걷기, 가끔 책 읽기. 의미 없이 가끔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가끔이라는 단어는 이상했다.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날. 그렇지만 까먹지는 않을만한 기간. 가끔, 가끔은 며칠일까. 삼일? 사일? 일주일? 눈을 깜빡인다. 여자는 가끔 움직였고, 가끔 행동했고. 가끔 판단했다. 매번 새로이 쓰이는 가끔에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밤이 찾아왔다, 밤이면 야생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고요한 저택에 혼자 있다보면 이상한 소리도 들리긴 했다. 있을리 없는 인기척 소리가 들린다거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 같은 거.

 

악몽을 꾸는 밤에도 연락할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외로운 밤이면 벽난로를 켜놓고 늘어져 책을 읽었다. 책에 빠져 시간을 보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다시 외로움이 밀려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소파에 늘어졌다. 타닥거리는 벽난로의 불씨가 약해져갔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이 꺼지면 주변이 훅 어두워졌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밀려오는 잠에 취하다 추위를 견딜 수 없을 때 쯔름 일어나 장작을 채웠다.

 

마법사의 마법엔 윤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의 기호에 따라 사용하고 말고만 있었다. 그러기에 더더욱 마법사에게 감정은 허용되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마주하면 이해하지 못하기에 사람으로 보지 못한다. 마법을 쓰는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겐 소모품과도 같았다. 마탑의 보호라는 이름의 감시 아래 그나마 인간적인 처우를 받으면서 살아갈 뿐이었고, 마탑을 나온 인간도 마법사도 아닌 여자는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마탑에 나온 마법사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부족한 감정을 계약으로 채우거나 죽을 때까지 긴 시간을 도망치며 보내거나. 전자와 후자. 어느 쪽에도 적응하지 못했던 여자는 타고나길 충만한 마력으로 길고 긴 수명을 소모하며 살고 있었다. 이젠 기나긴 삶을 정리하고 싶었다. 혼자서 시간만 때우는 삶은 지루했다.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상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해서, 아무도 모르는 나, 아무것도 없는 삶. 결국은 이 죽음 또한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겠지만, 쓸데없는 생각으로 계절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끝내야지 다짐했다.

 

여자의 취미는 요리였다. 살기 위해 하던 식사에 취미를 붙이니 실력은 금세 늘었다. 다만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 없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식사였지만 오늘만큼은 소중한 사람에게 해주듯 혼신을 기울여 요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지막을 준비했다. 오리고기부터 포도주, 디저트까지 길로 넓은 테이블이 무너질 만큼 많은 양을 요리했다.

 

여자는 은은한 촛불이 분위기를 띄워주는 테이블의 한 가운데 앉았다, 따뜻한 분위기와 화려한 음식들과 대비되도록 여자는 나이프를 들지 못했다. 다 먹지 못한 요리는 처리하지 못해 썩어가겠지. 구더기가 생기고, 하루살이가 꼬이고, 존재해도 살아있는 취급을 받지 못하는 미물들이 전부 먹어 치우겠지. 여자는 한 숟가락도 들지 못한 채 나이프를 놓았다. 넓은 식당에 탁하는 소리가 울렸다. 끼익 의자를 빼 일어서곤 서재에 들어갔다.

 

숨이 끊기면 나도 어떤 존재의 식사가 될까. 생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언제 눈을 감을까. 오늘 하루를 다 보내고? 아니면 정오가 지나서? 그것도 아니면 심심해서 지루하다 느껴질 때? 여자는 제일 좋아하는 책을 얼굴에 덮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뜨지 말까. 곧 잠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멀리서 둔탁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끊기듯 들려왔다. 여자는 감던 눈을 떠 서재에서 나왔다. 여자는 소녀를 보고 놀랐다. 옷은 넝마가 되어있고, 초라한 명색의 소녀가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당당한 모습으로 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기적인 가벼운 변덕에 가까운 호의로 여자는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음식이 아직 많이 식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음식을 만들었던 노력이 헛되지 않았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여자의 마지막 날은 소녀에 의해 연장되었다.

 

소녀가 씻으러 들어갔다. 소녀는 떠나간 사람을 생각나게 했다. 닮은 걸까.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였지만 애틋해졌다. 소녀의 옷을 챙겨주고 머리를 말려주고 나니 소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오랜 고립생활을 하다보니 일반인은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가 마법사라는 걸 알아버렸겠지? 혹시 마녀라는 것도 알아챌까? 네가 겁에 먹었을까?

 

재빨리 소녀를 재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들 때면 문득 생각나는 기억들이 있다. 옛 기억은 떠올리면 따끔했다. 소녀가 갈 때까지만 살자. 소녀를 잘 챙겨주고 어서 보내야지. 나는 남은 생을 반환하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돌아갈 거야. 며칠만 재워주고 보내자.

 

아침이 되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아무리 정신이 피폐해도 아침은 챙겼다. 오늘은 저택에 혼자가 아니라 더 신경 쓰는 아침이 되었다. 아침을 챙기던 건 전에 같이 살던 아이와 있을 때 만들어진 습관이었다. 습관이란 게 무서웠다. 소녀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여자는 소녀의 시선을 모른 척 했다. 할 수 있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저택 밖을 나온 여자는 오랜만에 맡은 바깥공기에 작은 상쾌함을 느꼈다. 환기로는 맡을 수 없는 청량한 공기였다. 여자는 주변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때 즈음 저택으로 향했다. 소녀가 일주일 후에 떠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저택에 들어갈 수 없었다. 소녀가 꺼내려던 이야기는 아마 마녀와 관련된 이야기겠지. 살다 보면 건드리기 싫은 이야기가 있다. 내게 마력이 그랬다. 산소와 같았지만, 삶이 권태로운 내겐 필요가 없었고 부질없었다.

 

내 저택이어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같이하고 저택을 나와 숲을 방황했다. 그러다 밤이 아주 많이 깊어지면 들어갔다.

 

그날은 늦은 새벽이었다. 사람 하나 늘어난 게 뭐라고 소녀가 있다는 흔적이 떠나간 아이를 생각나게 했다. 감정은 하나를 알게 되면 굳이 얻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있다. 외로움이란 게 그랬다. 외로운 밤이었다.

 

달빛이 밝아서 서글퍼졌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있을까. 넌 내게 무슨 말을 할 거니. 아이는 과거의 자신을 지워달라 매달렸다. 눈을 뜨면 전날이 기억이 나지 않게 해달라며 하루종일 울었다. 여자는 아이의 슬픔을 대가로 시간을 교환했다, 아이는 슬픔을 느끼지도, 과거를 그리워하지도 않은 채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면 더 이상 슬프지도 힘들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같이 지나온 시간을 추억할 수 없단 건 슬픈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하루를 살았다. 아이는 매일 아침이면 식사하며 나의 정체를 묻고 장소를 물었다. 매일매일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올 때쯤 아이는 오늘이 며칠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아이의 시간은 계약했던 겨울에 멈춰있었다. 꽃이 피는 아름다움을 잊었고, 여름의 싱그러움을 기억할 수 없었다. 아이는 매일매일 좌절했다. 기억과 별개로 감정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아이의 일기가 늘어날수록 아이는 더욱 감정적으로 변했다. 일기를 숨겨도 매일 날짜를 물었고 일기를 적었다.

 

아이는 시간이 멈춤에 절망했다. 내가 받은 건 아이의 슬픔이었으므로, 아이의 시간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여자의 계약은 아이에게 시간을 빼앗은 게 아닌 어제를 잊는 법을 알려줬을 뿐이었다.

 

매일 같은 질문을 하던 아이는 아이와 만났던 겨울이 오기도 전에 떠나버렸다. 여자는 아이가 남기고 간 슬픔을 품고 태어나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슬픔은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지만 여자는 사랑을 몰랐다. 수많은 시간을 거치며 알게 된 감정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도 감정인가.

 

아이와 같은 나이대의 소녀는 아이를 떠오르게 했다. 그래서 저택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소녀를 내칠 수도 없었다. 그게 동정인지 미련인지 호의인지, 아이를 겹쳐보는 이기심인지. 무어라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단호히 잘라내는 건 너무하잖아. 여자는 소녀가 돌아가면 사라져버리겠다고 생각했다.

 

달빛이 내려앉고, 밤은 깊었다. 상념이 많아질 새벽에 창가에 걸터앉았다. 한참을 그리워하다 소녀가 내 감정을 엿보았단 걸 알아챘다. 저택 구석구석 여자의 마력이 돌지 않는 곳이 없는데, 그런 인기척 하나를 못 잡아낼까. 빼도 박도 못하게 마녀임을 알아챘겠지. 이젠 새벽에도 저택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잠은 나무에서 잤다. 동이 트는 아침엔 저택으로 돌아갔다. 얼굴 보기 껄끄럽다고 하루아침에 냉랭하게 굴며 굶기기엔 신경쓰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