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제목미정(GL로판)

06. 저랑 계약해요. (4,801자)

소녀는 짐을 싸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소녀의 짐은 처음부터 없어서 떠날 짐도 없었다. 짐 정리가 어렵지 않았다. 여자가 첫날에 챙겨준 세안 도구와 수건,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모두 여자가 내어준 것들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많은 걸 가지고 떠나게 되는 기분은 이상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도 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짐 싸고 책 읽다 방에 오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굳이 사용인이 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켜지고 꺼지는 등불이 신기했다. 마력을 퍼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던 여자가 생각났다. 체력도 마력의 양도 어마어마한 거겠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여자가 생각났다. 떠나지 말라면 떠나지 않을 거냐 말하던 여자의 표정이 구슬퍼 보였었다. 소녀는 그 표정을 나를 향한 걸 알았다. 나는 그에게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게 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상념을 좇다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창밖엔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나둘 간혹 내리는 비가 굵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소녀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날이면 떠나간 사람들이 떠올랐다.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비가 오는 날 떠나버렸기 때문에 소녀에게 비는 상실이었다. 삶의 끝을 생각하면 소녀는 언제나 남아있는 쪽이라 떠나버린 사람들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죽음엔 원망할 대상이 없다. 보이지 않는 사회구조를 향해 욕하기엔 그 사회 속에서 보호받고 있었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침묵하기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보다도 부조리한 죽음이 희생으로 포장되는 것도 끔찍하고 떠나버린 사람을 놓아주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싫었다. 매일 무력감에 사무쳤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덧없는지. 죽음을 입에 담는게 어려워서,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보고 싶다. 한마디에도 숨이 막혔다. 감정에 죽을 것 같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내게, 삶의 이유가 되었다. 살아야 했고, 살아가라 했고, 살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마지막 했던, 기억에 남긴 말은 살아가라는 말이었으니까. 소녀가 죽으면 소녀를 사랑해줬던 사람들의 존재를 증명해줄 사람이 없어 살아가야 했다.

 

살다, , . 시옷이 들어간 단어들이 호흡을 앗았다. 비가 내리면 귀가 멍해졌다. 시끄럽게 바닥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더 이상 생각하면 우울해질까 봐 식당으로 내려갔다. 여자랑 같이 아침을 먹는다면, 누구라도, 곁에 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당엔 아무도 없었다. 1인분의 식사 옆에 작은 지도만이 놓여있었을 뿐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괜스레 여자가 원망스러워졌다. 혼자서 아침을 먹고 싶진 않아 접시를 덮어두고 식당을 나왔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예의니까 그의 얼굴을 보고 가고 싶었는데 그는 내 얼굴이 보기 싫은 모양이다.

 

방으로 돌아와 가방을 감싸 안았다. 여자가 가져가라며 준 가방이었다. 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입고 온 옷들도 넝마가 되어버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인사는 하고 싶었는데. 계획했던 일이 틀어져 할 일도 없었다. 침대에 앉아 창밖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어진다. 세상에서 제일 미우면서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립다. 빗소리가 굵어지면 굵어질수록 나를 떠나갔던 그 순간이 생각나서 울고 싶어졌다.

 

울고 싶어도 울음을 삼킨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죽지 않기 위해 버텨야 했다. 가을이 와 또다시 비가 내리면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내게 비는 떠나간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과 같았다.

 

차라리 잊으면 나을 걸, 왜 다들 하나같이 비 오는 날에 떠나서 하나의 징크스를 만들어준 건지.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 조금은 덤덤해졌다고, 꺼내기조차 버거웠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때보다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니까. 이제는 작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다. , . 호흡.

 

, 틱틱. 창문을 두드리던 빗줄기는 굵어졌다. 우려했던 비가 내렸다. 천둥이 치고 세찬 비가 떨어진다. 슬픔이란 무릇 그렇듯 예상치 못한 순간이 밀려온다. 괜찮다 되새겼던 생각이 무엇이 괜찮은지 생각하다 우울에 잠긴다. 이 넓은 저택에 혼자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택에 여자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기요. 를 외치며 저택을 돌아다녔다. 내 목소리가 울리면 울릴수록 목구멍에 무언가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날이 흐려서 낮인지 밤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빗소리가 내 목소리를 묻어버려서 여자가 보고 싶었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게 한 그가 원망스러웠다. 지도를 가방에 넣고선 가방을 끌어안고 저택 문 앞 계단에 쭈그려 앉았다. 비스듬히 내리는 비가 옷을 적셨다.

 

인사할 거야. 그의 얼굴을 보고 고마웠다며 또 보자고 말할 거야. 젖어가는 흰 셔츠에 맨살이 붙었다. 하필이면 떠나야 하는 날에 비가 올까. 여자라면 비가 오니 며칠 더 머물라고 해주지 않을까. 붉어진 눈가를 훔쳤다. 날이 흐렸다. 밝아야하는 낮인데도 울창한 나무가 만들어낸 긴 그늘이 어두웠다. 쭈그려 앉아 비를 맞으니 처량해진 기분이 몰려왔다. 몸이 으슬으슬 추워진다. 여자를 만나면 바로 인사하고 떠나야지. 여자의 얼굴만 보려고. 그리고 가려고. 비를 맞으면서 합리화인지 그리움인지 처량함에 빠졌다. 스물을 갓 넘긴 소녀는 어리고 서툴렀다. 빠르게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삶에서 미성숙한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멀리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한 손에 펴지 않은 우산을 팔에 건채 걸어오고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았지만, 비에 젖지 않았다. 여자 위로 얇은 막이 있는 것처럼 비가 튕겨 떨어졌다.

 

여자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새가 낮게 날길래 비가 오려나 싶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나니 한두 방을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오후가 되면 많이 내릴 게 분명했다. 여자는 비가 오면 마력으로 얇은 막을 만들어 우비처럼 쓰고 다녀 날씨가 상관이 없어 저택엔 우산이 없었다. 여자는 곧 떠날 소녀를 생각했다. 저택엔 우산이 없었고 소녀에겐 비를 막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소녀가 비가 그치고 가도 상관은 없었지만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더 머물라는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여자는 소녀에게 챙겨줄 우산을 사기 위해 마을로 내려가기로 했다. 아침을 같이 먹을 수 없었다. 소녀가 떠날 시간을 맞추기 위해선 일찍 다녀와야 했다. 소녀가 먹을 1인분의 식사를 식탁에 준비해놓고 여자는 저택을 나섰다.

 

여자는 소녀의 얼굴을 보는 게 껄끄러웠다. 소녀 앞에 선 실수만 하는 것 같네. 피했던 건 맞는데, 피하지 말라고 말하는 소녀의 얼굴이 안쓰러워서, 다른 사람이 생각났다. 내 외로움에 널 이용하고 싶지 않아서. 얼굴을 보면 정드니까 거리를 두는 게 맞는 거잖아. 아닌가. 모든 게 실수였나. 지난 일을 후회해봤자 의미가 없고, 마지막만큼은 곱게 꾸며야겠다. 비 오는 날에 보내는 게 미안해 이별만큼은 얼굴을 보고 해야지.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여자는 소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혹시 자기가 마을까진 데려다줘야 하는 게 아닐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비를 맞으며 문 앞에 앉아있는 소녀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여자가 소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당혹으로 물든 목소리였다.

 

너 여기서 뭐 해."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자를 응시했다. 소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 반쯤 비어 보였다. 붉어진 눈가가 여자의 시선을 끌었다. 여자는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소녀의 젖은 셔츠에 여자의 손이 축축해졌다. 소녀를 부축해 끌어안자 여자의 옷도 축축해졌다. 여자는 개의치 않고 소녀를 저택 안으로 이끌었다. 소녀는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여자의 온기를 확인이라도 하는 건지 꼭 끌어안고는 여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굵은 비가 떨어졌다. 소녀는 여자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여자는 당황했다. 갑자기 제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녀에게 묻고 싶어졌다. 혹시 울기라도 하는 걸까. 여자는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소개를 숙이고 소녀의 얼굴을 감쌌다. 소녀의 두 볼에 여자의 따뜻한 양손이 닿았다, 소녀는 천천히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굵은 빗소리에 소녀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저랑 계약해요. 영생을 살게 해주세요.“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온 세상을 빗소리가 잠식한 듯이 쏟아 내리는 비가 머리를 울리게 했다.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들어가자.”

 

소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여자의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여자는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눈이었다. 며칠 묵게 해주니 왜 결국은 계약인 걸까. 몇 초 되지 않은 아주 길게 느껴진 침묵 끝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대가가 필요하단 건 알지?”

."

평생 사랑 같은 건 못할 거야.”

 

난 네게서 사랑이란 감정을 가져갈 거야. 그래도 괜찮아? 여자의 금빛 눈동자가 서늘한 푸른빛 띠며 밝아졌다. 여자는 숨을 들이쉬고 오른쪽 손을 내밀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것, 아스라이 하면서도 가까이 있는 것. 소녀는 인간이 아닌 외 것의 이질적인 기에 눌리면서도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뜬금없이도 호박색을 띠는 여자의 눈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그래. 그럼.”

 

여자가 차갑게 대답했다. 소녀가 오른손을 내밀자 여자가 손바닥을 맞잡고 놓아주었다. 소녀의 손바닥을 펼쳤다. 여자는 소녀의 생명선을 따라 검지로 그었다. 여자의 검지가 지나간 길에는 은은한 금빛이 맴돌다 손안으로 스며들었다. 금빛의 마력이 스며들며 어지러움을 동반했다. 소녀는 정신을 잃고 여자의 품속으로 풀썩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