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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05. 저한테 왜 잘해주셨어요? (3,600자)

날이 밝아왔다. 소녀는 새벽에 봤던 여자의 표정이 떠올라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면서 식당으로 내려가 본 여자는 여전했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소녀를 맞았으며 소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음식의 맛 또한 변함없이 훌륭했다. 대화는 없었다. 둘 사이에는 공통된 대화 소재가 없었다.

 

간단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저택을 나섰다. 오늘도 소녀는 서재로 향했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을 무렵 소녀는 책을 얼굴에 덮었다. 눈을 감았다. 마을에서는 살기 위해서 살았다. 먹고, 자고, 그저 생을 연명하는 데 집중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은 지키지 않으면 다 사라져버릴 것들이었다. 이 저택에 온 이후론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았다. 하루가 평안했음을 안도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지리에 익숙해지고자 저택 밖으로 나왔다. 사박사박 주위를 걸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도 없는 평온한 곳이다. 초록 풀들이 발목을 스쳤다. 조사하러 나온 발걸음이 산책이 되었지만, 소득이 없진 않았다. 우습지만 날이 좋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아 숲이 우거져 길을 모르면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알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여자는 매일 외출했다. 어디를 가는지는 몰라도 분명 이쪽 지리를 잘 알고 있겠지. 내일은 여자에게 같이 외출해달라 부탁해야겠다. 지금까지 내게 보인 선의로는 기꺼이 알려주지 않을까. 해가 저물기 시작해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올 때는 몰랐는데 저택 앞에 다다르니 화단에 관리된 꽃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서재에서 찾은 사진에 아이가 들고 있던 꽃들이었다.

 

여자가 관리하는 걸까. 그렇다면 아이는... 생각을 접었다, 화단에 만개하게 피어있는 꽃들이, 주위에 놓여있는 꽃꽂이 물품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듯해 보였다. 이내 신경 끄기로 했다. 나는 떠날 사람이었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생각하면 더 생각나게 되는 게 묘한 사람의 심리지. 그렇게 저택에 돌아와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아침은 여자와 함께했다. 아침을 같이 먹는 사이라기엔 서먹했다. 여자가 식사 후 바로 외출해서 그렀고, 더불어 고의로 피하는 느낌이었다. 새벽에 잠들지 못해 나와 마주칠 때에도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갈 뿐이었다.

 

날 피할 이유가 있나? 내가 그가 마녀라는 걸 알아서? 아니면 단지 신경이 거슬려서? 그렇다기엔 그가 나를 대하는 행동엔 악의가 담겨있지 않았다. 스스로 떠날 사람이라 되뇌어도 섭섭했다. 속상하네, 집주인을 쫓아내 버렸다는 잔잔한 불편함이나 죄책감도 있었고. 그렇게 예쁜 사람이 피한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고민은 밤까지 이어졌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택에 있는 여자의 흔적만이 여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시계 소리에 정신을 집중해도 잠들지 못했다. 느릿하게 일어나 슬리퍼를 신었다. 어스름한 달빛이 드리우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새벽 3시였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피곤한데 잠도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우면 상념이 많아졌다. 창가에 기대에 눈을 감는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가 뜨는 게 보였다. 오늘이 며칠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주위가 밝아지니 울창한 나무 사이 나뭇가지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는 게 보였다. 뭔가 싶어 자세히 보니 여자 같았다. 나무에 기대어 있는 여자. 언제부터 있었을까.

 

해가 점점 떠오르니 여자가 나무에 기댔던 머리를 떼어내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게 보였다. 높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려 긴 하품을 했다. 여자가 터덜터덜 저택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왜 멀쩡한 집 놔두고 나무에서 저래... 첫 만남부터 여자는 맹해 보였다. 저 사람은 날 피하는 거구나. 마음이 불편했다.

 

여자가 저택에 들어온 모습을 본 지 2시간이 지났다. 이쯤이면 내려가도 되겠지 싶어 아침을 먹기 위해 내려갔다. 식사는 정적이었다. 여자의 웃는 모습은 변함이 없었으나 가면 같은 웃음이었다. 이따금 식기 소리만이 들려왔다.

 

환기조차 되지 않는 식당은 답답한 공기로 꽉 채워져 갔다.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끝마쳤다. 소녀는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저 내일 떠나요.”

 

여자는 의중을 파악하듯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 피하지 마세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말투에 퉁명스러운 기색이 붙었다. 말하고도 머쓱해 여자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고, 이방인이니 굳이 피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하고 싶었는데 말이 모질게 나왔다. 그래도 한집에서 사는데, 이 저택에서 아침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코빼기 하나 안 비추는 건 섭섭하지 않나. 저택은 너무 크고 외로우니까 말 몇 마디 정도는 섞을 수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외부인. 손님. 신분으로는 염치가 없는 건가.

 

투정 부린듯해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혹시 나 때문에 저택 밖으로 나도는 거라면. 나한테 왜 먹을 음식과 잘 방을 내어주는지 조금은 묻고 싶었다.

 

첫날에 닿았던 여자의 손길이, 웃는 모습이, 새벽에 봤던 여자의 표정이, 맑은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서 심술이 났다. 내가 심술이 날 이유는 하나도 없는데도 마음이 불편했다. 여자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의 식사는 여기서 끝내도록 할게.”

 

여자가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여자는 소녀의 말을 티나게 무시했다. 소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저 처음 앉아있던 모습 그대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여자가 소녀 앞에 놓인 접시를 치우기 위해 잡았을 때 소녀는 여자의 팔을 잡았다. 두 시선이 부딪혔다. 소녀는 여자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저한테 왜 잘해주셨어요?”

 

여자는 소녀를 슬쩍 보고는 제 팔을 잡고 있는 손을 떼어내며 무심히 답했다.

 

손님이니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였다. 왜 나는 이렇게 심술이 났던 거고, 뭘 기대했던 걸까. 소녀는 당황한 모습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식탁 위에 타고 있는 촛대만 남을 때까지 혼자 넓은 식당을 자리 잡고 있었다. 답답한 공기에 산소가 부족했다.

 

왜 서운하지. 나는 아직 어린가봐. 어느새 여자는 주방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끝마친 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코트를 입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왜 아직도 이러고 있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다가올 때마다 은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여자는 식탁에 걸터앉아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금빛으로 반짝이는 투명한 눈동자에 소녀의 모습이 담겼다. 소녀는 여자의 이목구비를 뜯어보았다. 긴 속눈썹에서 오뚝한 코, 작은 입술, 목선을 타고 내려오는 머리카락. 여자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소녀는 심장이 덜컹거렸다. 코끝이 닿을 거리에서 여자는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내가 떠나지 말아 달라고 하면 가지 않을 거니?”

 

여자는 소녀의 얼굴을 굽어보았다. 무언갈 되짚어보듯 느릿하게 훑었다. 이내 여자는 서글프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괜한 소리를 했네. 미안.”

 

준비 잘하고,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줘. 챙겨줄게. 여자는 다정하게 소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손이었다. 소녀는 여자의 손이 지나간 볼이 시렸다. 여자는 소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저택에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