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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07. 계약 (3,663자)

긴 잠에 빠져들었다. 소녀가 눈을 떴을 땐 비가 그친 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에서 눈을 든 소녀는 이틀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찌뿌둥했다. 엄청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졸음이 끝도 없이 잠이 밀려온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인다. 의식이 꺼지기 전 있었던 일을 가늠하듯 깜빡깜빡. 지난 일을 기억해보려는 노력도 잠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었다. 눈을 감고 있다 문득 이대로 잠들면 깨어나지 못할까 겁이 나 눈을 뜬다. 윙윙 울리는 머릿속을 무시하며 천천히 일어난다.

 

일어났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작은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덮은 여자가 느릿하게 침대 맡으로 걸어왔다. 소녀는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여자를 경계감 서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여자는 소녀 옆에 앉아 소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몸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소녀는 여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잠깐 깨울까 했는데, 마침 잘 일어났네. 이거 먹고 다시 자.”

 

여자는 소녀의 손에 다른 색과 모양의 알약을 쥐여주었다. 여자는 식사 대용으로 먹는 약이랑 감기약이라며 물과 함께 건넸다. 소녀는 손에 쥐어진 알약을 살피며 망설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했다. 남이 준 약을 함부로 받아먹으면 안 되는데... 이미 여자가 준 음식을 많이 먹긴 했는데... 정신이 깜빡깜빡 끊긴다. 정신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다.

 

게다가 넌, 비도 많이 맞았잖니.”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뇌가 울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잠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소녀는 알약을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켰다. 소녀는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흐렸다. 여자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여자는 이불을 끌어 올려 소녀를 덮어주었다.

 

무슨 말을 하려거든 일어나면 하자. 들어줄게.”

 

여자는 소녀의 눈을 감겨주었다. 소녀는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어떠한 꿈도 꾸지 않았다. 깊고, 깊은 잠이었다.

 

여자는 잠든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정일까. 다시는 계약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차갑게 식어가는 네 체온이 두려워 손을 잡아버렸다. 여자는 소녀의 뺨을 쓰다듬는다. 앳된 얼굴은 솜털마저 남아있을 것 같았다. 계약은 어디서 알아 왔는지. 멋대로, 그렇게 요구하고 휘두르며, 내 영역을 침범해 오는 거니. 창밖을 바라봤다. 장마를 알리는 먹구름은 태양을 가리며 빗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여자는 소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선 방에서 나갔다.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소녀가 다시 깨어나는 건 그로부터 3일 후였다.

 

소녀가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니 머리가 맑았다. 밖에선 새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한 울음소리다. 몸이 적응하기 위한 잠이었단 말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눈을 뜬 소녀는 몇 분째 눈만 깜빡였다. 몸이 찌뿌둥했지만 이불 속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너무 아늑하고 편안해서 1센티미터라도 움직이면 불편할 자세였다. 이불 속을 꼼지락거리다 여자와 했던 계약을 떠올리며 손을 들어 본다.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다 금빛이 맴돌았던 손바닥을 제 검지로 그어보았다.

 

헛꿈이라도 꾼 것 같다. 허황된 소원을 빌며 매달렸던 자신이 떠올라 이불 속으로 숨는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은 언젠간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죽음을 떠올리면 겁부터 났다. 계약해달라니. 영생을 살게 해달라니. 여자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 무례하게, 도움을 준 사람인데. 자신의 감정에 급급해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해버렸다.

 

하여튼 그날에 비가 와서, 여자가 돌아오지 않아서, 우울한 생각이 밀려와서, 한순간 이성을 잃어버렸다.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하는 불길한 생각은 막을 틈도 없이 잠식해왔다. 영원히 살면 무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 빗소리에 귀가 먹먹하고 시야엔 여자밖에 보이지 않아서, 으슬으슬 낮은 온도에 안긴 체온이 따뜻해 내뱉어버린 말.

 

아무런 대책 없이 계약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계약하자며 여자를 잡았을 때 여자가 지었던 곤란한 미소가 떠올랐다. 소녀는 이불을 동여맨다. 비 오는 날이 아무리 싫어도 그를 붙잡고 징징대는 게 아니었는데.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짓인지 부끄러워졌다. 제발 꿈이었길 바라면서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부끄러움을 제쳐두고 다시 떠올려봐도 꿈이라고 믿을 만큼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여자의 실루엣에 반가웠고 서러움이 북받쳤다. 혼자 남겨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여자의 얼굴을 보고 손을 잡아,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점멸해가는 의식 속에서 부축해오던 여자의 품이 따뜻했다.

 

그날 밤을 생각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를 생각하던 참에 그가 들어왔다. 제 발이 저렸으나 표정을 갈무리했다. 방금 깨어난 척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킨다. 여자는 소녀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니?”

.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짧은 침묵이 스쳤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다 여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배고프진 않아?”

 

여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녀의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작게 웃으며 식탁에 놓여있는 간단한 샌드위치를 들고 돌아왔다. 여자는 수프 가루가 다 떨어져서, 일단은 이거라도 먹자. 꽤 오래 잠들어서 샌드위치도 위가 부담스러워할 거야. 라며 다정하게 덧붙여주었다. 소녀는 여자가 건네는 샌드위치를 받고 오물오물 먹었다. 여자는 소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조각째의 샌드위치를 반쯤 입에 물었다. 여자는 그때야 입을 열었다.

 

“...기억 나?”

 

여자가 어째서 샌드위치를 거의 다 먹도록 잠자코 기다려줬는지 알겠다. 여자의 물음에 비 오던 날 부렸던 추태가 떠올라 사례가 걸릴 뻔했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소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짧게 침묵했다.

 

일단 계약은 성립됐는데...”

 

여자가 눈동자를 굴리다 소녀와 힘겹게 눈을 마주쳤다.

 

감정은 유한한 거라 내가 죽으면 네게 돌아갈 거야. 죽고 싶어질 때는 언제 죽게 해달라는 식으로 재계약해야 하지만...”

 

소녀는 이어지는 여자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착잡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 그러니까 내가 죽어도, 너는, 계속 살아갈 거야.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자는 눈동자를 굴렸다. 근데, 그때 너 계약 안 했으면 쓰러질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서 있었을 거잖아... 여자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변명하듯 덧붙였다.

 

소녀는 그런 여자의 표정을 뒤로한 채 먹던 샌드위치를 마저 먹었다. 옆에 놓여있던 우유까지 홀짝이고서야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죽는 것보단 나아요.”

 

옅은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였다. 담백하고 단호한 태도로 죽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소녀. 여자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였다. 여자는 끝끝내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킨 채 어설피 웃었다. 소녀가 가진 확신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가늠되면서도 너는 달랐으면 좋겠다는 미약한 희망이 말을 덮는다. 여자는 소녀가 다 먹은 접시와 우유를 담았던 잔을 챙겨 들었다.

 

"일단은 좀 더 쉬어. 이만 나가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