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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09. 가끔은 유치해도 (3,224자)

세리나가 미엘의 집에서 머물게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미엘은 일주일에 두세 번 외출하는 듯했다. 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있어서 이대로 살아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변하지 않고 재미없는 하루들의 반복이었다. 아침이면 미엘과 밥을 먹었고 혼자 산책했다.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세리나의 일과 전부였다.

 

미엘과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서로 할 말이 없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가 끝이었다. 둘 사이에 큰 관계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통성명하지 않았던 사이에서 이름을 아는 사이가 되었을 뿐이었다. 소녀는 저택에서 지내면서 고민했다.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삶이 싫지는 않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사랑을 알려주겠다 했지만, 이 흐릿한 감정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난감했다.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문학적이었다. 사랑, 사랑. 한 단어를 오랫동안 입에 머금는다. 같은 단어를 오랫동안 생각하면 그 단어가 원래 존재하고 있었던 단어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사랑은 뭘까. 우리는 사랑을 왜 이야기 할까. 노래로, 소설로, 영화로. 사랑을 이야기 한다. 다양한 모양과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어라 딱 잘라 말할 수 없기 때문 아닐까. 책도, 노래도, 시도. 다 사랑을 말한다. 사랑. 이 두 글자에 담긴 감정은 하나로만 정리할 수 없어서, 사랑을 생각했다. 세리나는 책상에 앉아 종이를 꺼냈다. 만년필을 잡고 자신이 사랑했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게 사랑이었나 싶은 순간들도 빠짐없이 적었다. 초저녁부터 작성하기 시작하던 목록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펜을 놓을 수 있었다. 목록을 다 작성한 세리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할 목록에 동그라미를 표시해놓고는 침대 옆 사이에 보이지 않도록 끼워 넣었다.

푹신한 침대에서 뭉실한 이불을 덮고 세리나는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세리나는 자신이 밤에 작성했던 목록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미엘이 차려놓은 아침은 정말 맛있었다. 매일 같은 식사를 준대도 질리지 않고 먹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평소처럼 밥 먹고, 정리하고 미엘은 나갈 준비를 했다. 세리나는 아침부터 미엘의 주변을 맴돌았다. 어젯밤 적은 목록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가끔은 유치해도, 뻔하고 쉬운 게 정론일 수도 있지. 부끄럽지만, 떠오른 방법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미엘이 설거지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옷장에 들어갈 때까지 4미터 안팎의 거리를 서성서성, 따라다녔다. 미엘은 마지막 향수까지 뿌리고 나서야 나갈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흰 셔츠 위로 우드 계열의 적당히 무거운 향이 깔린다.

 

세리나는 어정쩡하게 미엘을 힐끔거렸다. 미엘은 그런 세리나를 보고 고개를 기웃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안절부절못해라 하던데, 무슨 일이지, 혹시 할 말이 있나. 미엘은 문 앞까지 따라 나온 세리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책 안 읽어? ...혹시 원하는 책이라도 있니? 구해줄까?”

 

세리나의 답이 없자 미엘은 질문을 바꿨다. 세리나는 미엘의 구두코에 시선을 깔았다.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세리나의 귓불이 붉어졌다. 낯간지러웠다. 세리나는 큰 숨을 들이쉬었다. 곧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팔을 벌렸다.

 

사랑의 포옹... 하려고요.”

 

미엘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지금껏 저 말을 하려고 그렇게 주변을 기웃거렸나. 우물쭈물했던 세리나가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리나는 부끄러웠지만 결연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미엘은 웃음을 꾹 참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팔짱을 끼고 세리나에게 물었다.

 

내가 안 한다고 하면?”

 

세리나가 주춤거렸다. 미엘은 속으로 키득대며 세리나를 살폈다. 세리나의 푸른 눈이 미엘을 올곧게 마주했다.

 

하게 되실걸요.”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네.”

 

빨리 안기라는 듯 세리나가 팔을 휘저었다. 미엘은 한걸음 다가가 세리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한 품에 안겨진 세리나에게 미엘의 향수 향기가 훅 풍겼다. 진중하면서도 달달한 향기였다. 낮게 웃는 미엘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다녀올게.”

 

미엘은 짧게 인사하며 팔을 풀었다, 세리나가 미엘의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다녀오세요.”

 

, 여자가 싱긋 웃으며 저택 밖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세리나는 문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세리나의 옷에 미엘의 향수 냄새가 밴 것 같았다. 움직이면 미엘의 향수 냄새가 날아갈 것 같아 움직이지 못했다. 분명 어딘가 맡아본 향이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향수를 기억해내고 싶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

 

 

저택에 나온 미엘은 깊고 어두운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택에서 한참을 걸어 어두운 동굴로 들어갔다. 빛이 닿지 않을 속을 향해 걷는다. 동굴에 고인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미엘은 심호흡하고 술식을 외웠다. 금빛 마력이 어두운 동굴 안을 밝혔다. 미엘의 시야에 커다란 마법진이 생긴다. 미엘은 자연스럽게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진을 통해 온 곳은 중앙마탑이었다. 마탑은 제도별로 동서남북 나뉘어 있다. 나뉘어진 마탑을 총 통솔하는 곳이 중앙 마탑이었다. 대마법사과 상주하는 곳, 수도에서 황궁과 가장 가까이 지어져 있는 건물이었다.

 

중앙은 경비가 삼엄했다. 웬만한 관계자를 제외하곤 중앙마탑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출입을 허가받는다고 해도 3층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으며, 사각지대 없이 실시간으로 기록되었다. 보안이 살벌했다. 하지만 미엘이 중앙마탑의 몇 겹의 보안을 뚫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숨어서 사는 미엘 이었지만, 주기적으로 마탑을 찾아야했다. 미엘이 마력을 갈무리했다. 손을 몇 번 휘젓자 금빛 마력이 사그라들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미엘을 맞았다.

 

오셨습니까, 미엘님, 대법사님께선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미엘은 아론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대법사실로 향했다. 대법사실은 대마법사 혼자 사용하는 개인실로 대마법사가 신임하는 몇몇 빼고는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 곳이었다. 미엘은 대법사실 가운데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는다. 익숙하게 파고드는 쿠션감은 이질적이었다. 변하는 시간 속 변하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다 기억에 가라 앉는다

 

테이블 밑에 놓여있는 책을 익숙하게 책을 꺼냈지만, 글이 읽히지 않았다. 미엘이 가져다 놓은 책, 배치한 가구. 익숙한 구조와 조금 달라진 향. 수도에 오면 항상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들이 치고 올라온다. 미엘은 수도로 평생토록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평생 잊혀서 죽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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