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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08. 너 이름은 뭐니? (4,408자)

여자는 소녀가 지내는 방을 빠져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도착한 주방은 음식냄새가 가득했다. 입맛을 돋구는 음식 냄새에 토기가 일었다. 여자는 주방에 딸린 뒷문을 벌컥 열었다.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는 통을 열고 토를 쏟아낸다. 목이 걸걸했다. 맑은 침이 입가 주위로 떨어져 내려 헛웃음을 짓는다. 감정을 거래한 계약의 끝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은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존재지.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살아가고, 행복에 겨워 죽어버리기도 하니까.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복잡함, 갈망하게 되는 결핍. 사람은 빈 감정이 주는 공허를 견디지 못해 계속해서 어떤 감정으로 하루를 채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뭐지.

 

웃음이 나왔다. 계약. 말도 안 되는 계약은 신의 장난인가. 사람의 감정을, 사고팔고 하듯이 의뭉스러운 기운이 스쳐 지나가면 아는 것도 모르게 되고, 알던 것도 모르게 되고. 그게 그런가. 이성만으로 살아가면 안 되나. 감정이 뭐기에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면서 흔들리고 실수하게 되는 걸까. 마력은 뭐기에, 사람들이 설명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모든 걸 마법이라고 퉁치며 살아가게 하는 걸까. 여자는 소녀와 맞잡았던 손을 바라본다. 손을 쥐었다 편다. 토하며 잡았던 쓰리기통에 손에 냄새가 밴듯했다. 자신조차 버티지 못한 영겁의 시간을 소녀가 과연 견딜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여자는 소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어 쓰레기통에 얼굴을 박는다. 위액이 목구멍을 스쳤다.

 

**

 

여자는 마른세수했다. 숨을 두어 번 들이마시고 몸을 움직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움 되지 않는 생각들이 떠오를 것 같았다. 여자는 정리된 식기들을 괜시리 들추며 치우기 시작했다. 먼지 하나 없는 곳 빗자루로 쓸어내며 맑은 숨을 쉰다. 불어오는 찬 바람이 폐에 찬다. 걷는다. 움직인다. 숨을 쉰다.

 

**

 

소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웠다. 어린애처럼 굴면서 여러모로 민폐 끼쳤다.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게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녀는 언제나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평생 후회할만한 선택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았는데 여기 온 이후론 후회하고 실패하고 부끄러운 일만 일어나네. 소녀는 앞으로의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계약이란 아예 없던 계획이라 그리던 근미래를 일부 수정해야 했다. 지금까지 세웠던 목표들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계획들이라 백지가 된 이 순간 머리도 백지가 되었다.

 

조금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혼자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각되어버리는 미성숙함에 눈을 꼭 감는다. 숨을 쉰다. 따뜻한 공기가 몸속을 채운다.

 

**

 

마주치면 풍기는 기류가 어색했다. 자연스럽게 소녀의 아침을 챙기는 여자도, 여자와 마주 앉아 식사를 거르지 않고 하는 소녀도 서로를 어색해하고 있었다. 식사를 끝마친 여자가 마시던 잔을 쓸며 설핏 입을 열었다.

 

오늘 날씨가 좋네, ...우리 조금 있다가 차나 마실까?”

그래요.”

 

두 마디가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소녀는 여자를 도와 식기를 정리했다. 정리를 끝마친 후엔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었다. 한구석에 자리 잡아, 한참 책을 읽던 그들은 오후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3층 테라스로 나갔다. 햇볕이 밝게 내리쬐었으나 더울 정도는 아니었다. 소녀는 의자에 앉았다. 차를 가지러 간 여자를 기다리며 테이블에 턱을 괸다. 따뜻한 햇볕에 잠이 올 것 같았다. 나긋하게 늘어지는 오후가 평화로웠다. 여자는 나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소녀도 나간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기이한 평안함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어쩔 줄 몰라 방치해두는 며칠은 아주 평화로운 살얼음판 위였다.

 

여자가 소녀 앞에 캐모마일을 놓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미지근한 차가 식도를 타고 내려오면 속이 뜨거웠다. 소녀는 가끔 속에서 끓는 온도의 감정을 어쩔 줄 몰라 했으며, 날것의 투박한 서투름을 차가운 이성으로 꾹 눌렀다. 여전히, 나는 어리구나. 생각하면서 뜨거움을, 식혔다. 여자는 커피를 자신 앞에 놓고 각설탕 컵을 열어 작은 집게를 들었다. 뜨겁게 김이 올라오는 커피에 각설탕을 넣었다.

 

잔을 채우고 있는 커피의 높이가 올라갔다. 소녀는 여자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각설탕 한두 개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뻐끔거렸다. 두세 개만 넣을 줄 알았는데,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라보다 퐁당퐁당 빠지는 대여섯 개의 설탕 덩어리에 당황했다.

 

너무 달지 않나? 여자는 한 입 마시고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너무 단가. 소녀는 여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찻잔을 놓고 각설탕을 더 넣기 시작했다. 저 정도면 커피를 안 마시는 게 나을 텐데. 여자가 소녀의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얼른 시선을 피해 캐모마일이 담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를 마시면서도 침묵은 계속됐다.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여자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중간중간 설탕을 넣었다. 소녀가 묻는다.

 

그렇게 먹으면 안 달아요?”

 

대답이 없었다. 여자는 검지로 손잡이를 쓸다 답했다.

 

쓴 건 싫어서.”

 

여자는 어색하게 웃었고, 소녀는 천천히 차를 홀짝였다. 속이 따뜻해졌다. 소녀는 저택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택 밖 너머에는 큰 호수가 보였다. 공주님이 사는 곳 같다. 비록 조용하고, 사용인은 하나도 없지만, 경치 좋고, 화려한 큰 저택에서 사는 귀족 같은 사람이니 동화에 나오는 공주랑 다를 바가 없지. 외롭게 살다 어느 날 왕자의 등장으로 행복해지고. 공주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랑을 하려나. 실없는 생각이 이어졌다.

 

멍하니 저택 밖을 바라보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사랑해보신 적 있어요?”

“.......없어...”

 

여자는 소녀의 물음에 움찔거렸다. 소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소녀의 표정을 살피다 찻잔을 들어 올렸다. 소녀의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되어 느릿하게 한 모금을 마셨다. 소리가 나지 않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너는?”

저번에, 떠나지 말아 달라고 하면 가지 않을 거냐 물었잖아요.”

 

여자의 물음에 동문서답의 대답이 들려왔다. 소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소녀는 저택 밖을 바라본 이후 한 번도 여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여자에겐 소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옆모습만으론 소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제가 사랑, 알려드릴 테니까 여기서 머물게 해주시면 안 돼요?”

네가 사랑을 어떻게 알아서.”

 

소녀는 차를 홀짝였다. 이 대화가 얼마나 웃긴지. 둘 다 알고 있었다. 사랑이란 단어는 연극과도 같아서 한 단어로 내뱉으면 우스워지는 경향이 있어. 사랑을 알려주겠다느니. 사랑을 어떻게 아냐느니. 소녀는 눈을 감는다. 여자도 눈을 감는다. 둘 사이 거리가 불어로는 바람으로 채워진다. 새소리가 들려온다. 해가 지면 벌레들이 날아다니겠지. 계절이 바뀌며 차가워지는 바람. 더워지는 태양. 뜨겁고, 강렬하며, 차가운. 한낱 조그만 생명체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을 가늠하다 여자는 식어가는 찻잔을 손으로 감쌌다. 찻잔 옆을 문질렀다.

 

소녀는 갈 곳이 없었다. 불사의 몸으로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자신이 깊은 산속에 사용인 없이 홀로 사는 이유도 그 탓이었다. 여자는 고민했다. 소녀를 집에 들여도 되는 걸까. 여자는 느리게 눈을 뜬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찻잔을 보고 있는 여자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그들의 대화는 항상 끝내기도 전에 종결되곤 했다. 대화인지. 질문에 이어지지 않는 말로 대답하기도 했다. 문학이라면 해석이 난무할 은유에 속마음 감춘 채 보이는 모습만으로 사고했다. 소녀는 여자의 무언에 저택 밖 생활을 생각했다. 여전히 깜깜하고 앞날을 알 수가 없지만 여기서 나간다면 어떻게 살까. 다시 이어진 침묵은 소녀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치기 전까지 계속됐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소녀를 바라보았다. 집요하게 소녀를 좇는 시선에 소녀가 긴장했다.

 

너 이름은 뭐니.”

 

순간, 소녀가 활짝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얼굴로 미소를 띠었다. 소녀는 여자의 물음이 허락이란 걸 알았다. 여자, 소녀. 이름 없이 지내던 기간제 관계에 이름이 붙여진다. 소녀의 움직이는 눈썹에 햇살이 반짝여 여자는 심장이 숨을 삼킨다. 따뜻한 햇빛이 소녀의 얼굴에 비춰 굴곡을 만들어냈다. 소녀 뒤로 비추는 태양은 소녀의 웃는 표정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여자는 소녀를 계속 마주 보지 못하고 커피를 마셨다. 목으로 넘어가는 커피가 유난히도 달았다. 심장으로 들어간 카페인은 심장을 뛰게 했다. 하나의 긴장감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앞으로 예측되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는 떨림. 불안감에 카페인. 심장 소리.

 

세리나에요. 당신은요?”

미엘.”

 

소녀는 여자가 제 이름을 묻는 게 좋았다. 또 성을 붙이거나 묻지 않아서 좋았다. 소녀가 여자에게 묻는 첫 질문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이름조차 모른 채 함께하던 시간이 순간이 아닌 추억으로 변했다. 둘에게 이름이란 종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