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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03. 당신의 존재 (공포 6,748자)

03

 

햇빛이 눈꺼풀 위에 내려 천천히 눈을 떴다. 몇 시일까. 해가 뜰 무렵에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이 떠졌다. 중간에 깨지 않고 늦잠을 자본 게 얼마 만인지. 기분 좋은 이불이랑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으로 일어났다.

 

발바닥에 푹신한 카펫이 닿는다.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나가니 맛있는 냄새가 났다. 소녀는 허기진 배를 안고 1층으로 내려간다.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저택에 사용인이나 다른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다른 점이 없는 저택을 한 번 훑어보며 식당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식탁에 수프를 놓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소녀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일어났니? 깨우러 가려 했는데 마침 잘 일어났네.”

어젯밤은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편히 잘 잤어요.”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의자를 빼주곤 자리에 앉았다. 소녀는 여자가 빼준 의자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크림수프였다. 자극적이지 않은 미지근한 온도의 수프는 목구멍으로 편하게 넘어갔다. 아침에 먹기 적당한 담백함이었다. 식사 동안 식기 소리만 달그락거렸다. 아무도 먼저 입을 먼저 열지 않았다. 마법과 마력, 마법사와 마녀. 앞으로의 일들. 생각이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생각도 형상화되지 않았다. 창밖에선 새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잖아요.“

그래서 언제쯤 돌아갈 생각이니?”

 

여자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내 눈을 바라보며 물어왔다. 굳이 여자의 질문에 재차 동문서답으로 할 말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눈을 깔고 천천히 답했다.

 

일주일... 후에요.”

 

여자가 일주일이란 말을 중얼거렸다.

 

알았어, 일주일 동안 저택은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돼.”

 

서재랑 영사실이랑. 욕실, 테라스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다 이용해도 좋아. 대신 그 후엔 꼭 돌아가야 해.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고. 라며 말을 덧붙였다.

 

.”

 

어차피 알 수 없는 저택에서 계속 머물 생각은 안 했으니까. 대화가 종결됐다. 더 이상 할 대화가 없어 식사에 집중했다. 은색의 식시가 달그락 거린다. 커다란 주방은 작은 소리도 넓게 퍼졌다.

 

여자는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아서 좋았다. 나 또한 여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같이 사는 다른 사람은 없느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쩌면 말이 끊긴 게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뻔히 보이기에 묻기엔 부질없는 질문이었고, 대화 소재로 쓰기엔 실패할만한 물음이었다.

 

여자는 식사가 끝마칠 때까지 기다려준 후 내 식기와 그녀의 식기를 가지고 조리실로 들어갔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어났던 방으로 향했다.

 

식사 후 여자는 외출한 듯했다. 할 일이 없었으나 집주인이 없는 집을 홀로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어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연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창밖 공기에 숨을 들이쉬었다. 사방이 높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상쾌한 나무 향이 바람을 타고 불어온다. 평화롭다. 소녀는 눈을 감았다.

 

울창하고 올곧은 나무들이 커다랗고 음산한 대저택을 숨겨주었다. 소녀는 지금 저택에 있다. 저 울창한 나무들을 지나면 내가 살던 마을이 나온다. 절대 돌아가지 않을, 그리고 돌아가 살 수 없는 마을. 나는 마을을 벗어났고, 되도록 멀리 더 멀리 더 나가 살 생각이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었다. 미래는 아득하고 현재는 코앞이다. 식사 중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고. 낮고 진지한 여자의 음성. 눈을 감는다.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는 건가. 새삼, 인생 헛살았네.

 

여자는 허리까지 오는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반곱슬의 머리카락은 움직일 때마다 좋은 향이 났다. 귀족들이 입을 법한 드레스를 입고 있진 않았으나 얼굴이 워낙 화려해서 이곳을 떠나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언니도 은발이었는데.

 

저택에 홀로 사는 의문의 아름다운 여자. 기묘한 존재다. 어젯밤 그가 마도구를 쓰던 모습이 떠올랐다. 마법사와 마녀. 큰 차이가 있다면 마법사는 국가가 보호해주는 존재였고, 마녀는 공포의 존재로 사냥당하는 존재하는 점일까. 사람들은 참 신기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 싶으면 한참이나 힘이 없는 사람을 몰아 없애버리니까. 마녀라는 꼬리표 하나만 붙이면 공공의 적이 되니, 사람을 처리하기 참 손쉬운 방법이다.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태생부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마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스펙트럼이 좁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마력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어 통제되지 못하는 마력으로 재앙을 불러올거라 믿는 거다. 그렇게 지어진 게 국가에서 쌓은 마탑이었다. 마탑에 가면 감정을 이해하고 억제와 조절을 하는 방법을 배워 국가로부터 인정받는다. 마탑이 보호해 주지 않는 사람이 가진 마력은 그저 재앙일 뿐이라, 마녀라 몰았다.

 

여자가 마녀인지 마법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여자와 원만한 관계를 지내다 이 저택을 떠날 것이고, 잘 살아남아 오래오래 살 거야.

 

일주일이다. 신관들이 돌아가는 일주일 후에는 경비가 신관에 집중되어 마을 경비가 약해진다. 그때 집으로 돌아가 숨겨놓은 돈만 챙겨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야지. 마을 사람들이야 내가 제물로써 산에 오르는 모습을 보았으니 아무도 모를 테고. 다른 마을로 가서, 국경을 넘을 방법을 생각해보자. 좁은 마을에서만 살았으니, 소녀의 세상은 마을에서 들어오는 책과 입과 입으로 전해져오는 단순한 이야기뿐이므로 우물 속 개구리일 뿐이지만, 죽지 않기 위해선 뛰어들어야 했다. 살아있다면 언젠가 기회는 꼭 올 거라 믿어야지. 계획에 계획을, 생각에 생각하다 보니 밤이 깊었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소녀는 침대에 누웠다.

 

**

 

일찍 눈이 떠지길래 미리 주방으로 내려갔다. 여자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며 식사가 나오기에 시간이 남았으니 서재에서 기다리라 했다. 어딘지 몰라요. 라고 짧게 말하자 여자는 이층 중앙계단을 오르면 바로 보이는 큰 문이 서재라며 알려주었다. 소녀는 가볍게 고개 끄덕이며 주방을 벗어난다. 매번 봐도 큰 저택이다. 이렇게 큰 저택에 홀로 살면 외롭지 않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혼자 살게 된 작은 집도, 내겐 유독 크게만 느껴지던데.

 

서재에 들어갔다. 책이 천장까지 닿을 만큼 꽂혀 있었다. 책이 주는 냄새가 좋았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닮아있었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의 상태를 보아 여자는 책을 아끼는 것 같았다. 소녀는 책들이 꽂혀있는 긴 책장 앞을 느리게 걸었다. 고서부터 금서 가지 희귀한 책들도 가득했다. 책들이 내는 냄새에 마음이 편안해 졌다.

 

소녀는 가까이 있는 책 한 권을 꺼내 펼쳐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문자들에 내심 기분이 들떴다. 소녀가 살던 좁은 마을은 문맹률이 높았다. 다른 도시나 마을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 폐쇄적인 성격도 띠었고, 서로에 대한 간섭과 견제가 심했다. 농업과 수공업을 하며 다른 지역과의 교류를 지속했으나 지식인이 나타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젊은 아이들이 많은 걸 배워 세상을 알면, 마을을 벗어나 도시로 떠날 것이라고, 마을은 결국 쇠퇴하여 사라져버릴 거라고 어른들이 얼핏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런 분위기를 형성했던 게 마을 이장의 통치 방식임임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도 말을 얹지는 못했다. 소녀의 부모님은 항상 소녀를 보며 지식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하나라도 알려주기 위해 힘썼다. 언젠간 가족 모두가 마을을 벗어나 살 거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걸 배우고 듣고 공부해야 한다고. 소녀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평범함에 의문을 던지는 행위는 마을에 혼란을 가져오는 행동임으로 사사건건 질문을 던지는 소녀의 가족이 예쁘게 보는 사람은 적었다. 소녀를 보는 어른들도 한마디씩 얹고는 했다. 어린 것에 뭘 안다고 떠드는지. 할 일이나 하라는 말은 어디서나 듣는 소리였다. 당연하게도 소녀는 학문을 기피하는 분위기 속에서 공부에 일탈 감을 느끼며 흥미를 붙였다.

 

책을 펴 한줄, 한줄 읽어갔다.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진지하게 앉아서 공부하고자 책을 읽을 의도는 아니라 눈에 밟히는 단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면서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를 들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서재의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소녀는 책을 정리하고 일어나 여자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여자는 멋쩍게 웃으며 기본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간단히 식사가 끝마치고 여자는 저택을 나갔다. 소녀는 다시 서재에 들어가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책들 읽다 보니 온종일 책만 읽는 삶을 살 거라던 목표에 조금은 도달한 느낌이었다. 세 번째 책을 들었을 때 책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한 소녀와 여자가 저택 앞에서 꽃을 심으며 웃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빛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행복해 보이는 둘이었다. 사진 속 소녀에 작은 궁금증이 들었으나, 사진도, 책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여자는 새벽까지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고, 소녀는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

 

소녀는 잠귀가 밝은 편이었다. 누군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쉽게 잠이 깼다. 게다가 한 번 잠이 깨면 또다시 잠들 수 없는 타입이라 피곤했다. 눈 밑 옅은 다크서클이 지워지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창문을 바라봤다. 가끔은 아무런 소음이 들리지 않아도 눈을 뜰 때가 있었다. 오늘 밤처럼. 소녀의 눈에 창밖으로 달이 보였다. 시간을 가늠해보다 더 잠이 오지는 않을 것 같아 침대에서 일어난다. 여자는 돌아왔을까.

 

조심히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달빛이 들지 않는 복도는 작은 전구의 불빛이 주변을 밝혔다. 모든 게 마력으로 굴러가는 저택은, 하나의 무대 같았다. 규칙적으로 일렁이는 불빛이 지나가면 반짝였다. 소녀는 소음이 일지 않는 바닥을 느리게 걷는다. 복도가 꺾이고 그림자가 보였다. 소녀는 숨을 삼킨다.

 

한 걸음 다가갔다. 달빛이 달을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이 상에 맺혔다. 휘영청 뜬 달빛에 은빛의 머리카락이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이 났나. 투명한 피부가 창백에 가까워서 아스라했나. 소녀는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볼 수가 없어서 벽 뒤로 숨었다. 숨을 필요가 없는데.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이 달빛에 비쳐서, 한 폭의 명화 같아서. 여자의 구슬픈 표정이 한눈에 보여 엿보면 안 될 부분을 훔쳐본 것만 같아서. 숨도 죽이고, 숨어버리고.

 

여자는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듣지 않았다. 뒤를 돌아 방으로 돌아왔다. 잊기 힘든 상념이 하나가 더 생겨버렸다. 여자를 잊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게 이틀 전이었는데, 오늘 밤, 일도 더해져서 평생 남을 기억이 되어버렸다. 여자는 마녀일까. 마법사는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씁쓸한 표정을 짓지 못하니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마법사와 사람 사이의 마력은 거래와 거래로만 이루어진다. 사물에 마력을 주입하는 행동은 체력과 마력의 크기만 따른다면 한계 없이 사용할 수 있었으나 대가 없이 사용되는 마력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영향을 주고받는 일이라면 신체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치료라거나, 신경을 건드리는 일, 혹은 사람 당장의 미래와 과거를 바뀌어 버리는 일 같은 거. 마법사가 계약자에게 얻는 대가의 가치와 마력 사용의 가치가 동등하거나 이상일 때만 타격 없는 마력 사용이 가능했다. 무슨 기준인지는 모호하기는 했다. 객관적인 기준은 없었지만 대부분 납득할 정도면 가능했다.

 

마법사들이 마탑에서 교육을 통해 감정을 배워도 예외는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으나 공감할 순 없었다. 마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서 마탑이 세워져 교육을 시작한 이래로 마법 규정이 구체화되지 않았을 초창기쯤, 마법사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감정을 교환하는 계약을 하기 시작했다. 감정을 계약한다니, 참 아이러니한 소리였다. 감정을 물질화하면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일까. 사람들은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감정에 이름을 붙여가며 갈망하는 걸까.

 

마법사들이 보이지 않는 감정을 갈망하는 것 만큼, 일반 사람도 보이지 않는 부를 원했다. 바라는 게 일치한 두 존재는 서로가 납득 가능한 선에서 만족하며 거래를 진행했다. 사람은 부를, 마법사는 감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모두가 판단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부를 가진 사람은 불행하기 시작했고, 감정을 가진 마법사는 공정한 대가 마력을 없이 퍼주기 시작했다. 대가 없는 사랑을 베풀며 마력을 소진하던 마법사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사랑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악한 마음과 선한 마음은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힘과 판단에 감정적인 선택까지 어우러져 제국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질서가 무너졌다. 결국 마탑은 감정을 거래하는 계약은 금지했다. 마탑은 이런 조항을 어긴 마법사는 추방하겠다며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사람들은 추방당한 마법사를 환영해주지 않았다. 공포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프로파간다고 있었다.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쫓겨난 마법사라면 마녀라며 몰아 화형 시켰다. 왜 마녀라고 부르는지 이해는 안 되지만, 통상적으로 마녀는 악인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어 그렇게 명하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깊은 숲속에서 홀로 지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자는 마탑에서 추방당한 마법사겠지. 엄청나게 큰 저택의 사소한 곳에도 마력을 운용하던 여자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단 건 마녀가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감정이란 뭘까. 여자의 과거가 궁금했지만, 방으로 돌아온 소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꼬리 무는 생각들을 밀어내고 눈을 감았다. 오늘이 3일째 밤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