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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02. 아무것도 묻지 않은 밤(공포 4,221자)

02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소녀를 욕실로 이끌었다. 역시나 넓은 방 하나 크기의 욕실이었다. 한 사람이 쓰기엔 과할 만큼 사치스러운 욕실. 금이 박힌 욕조에 따뜻한 물이 금세 차올랐다. 소녀는 여자가 준 옷과 수건을 옆에 놓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의 흰 발이 물에 잠긴다. 미지근한 공기가 닿았던 피부에 따뜻한 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물에 몸을 푹 숙인다. 욕조 옆으로 물이 흘러넘쳤다. 넓은 욕조에 홀로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천민은 아니었지만, 귀족도 아니었다. 소녀는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자랐고, 가끔은 궁핍해도 배곯은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힘들어지긴 했어도 돌아가시기 전 남겨주고 떠난 것들이 많아 괜찮았다. 마지막 말이 뭐더라. 지금 슬픔은 잠시뿐이야. 소나기 같은 슬픔에 무지개를 지나치지 말렴. 이었나. 희미해진 목소리를 떠올린다. 혼자 살아도 굶진 않을 정도로 남겨주신 유산을 가늠했다. 이 저택에서 나간 후에 내가 해야 할 일들, 할 수 있는 일들. 상념이 밀려와 물속에서 거품을 만들었다. 보글보글. 돈으로 힘들어 본 적은 없는데 살던 집보다 넓은 욕실에 있으니 기묘한 기분이 덕지덕지 엉겨 붙었다.

 

몸을 일으켰다. 욕실 창문 밖으로 들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해가 밝아와도 어두운 먹구름은 빗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소녀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비와 관해선 즐거운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소녀가 살고 있던 마을은 오래된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수도와는 고립된 지역이었으므로 미신적인 토속신앙이 과학이나 논리보다 보이지 않는 허황에 미래를 기대었다.

 

마법이 있는 세상에서 믿으면 다 해결될 거라는 말은 주술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다. 소녀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이 저울질하는 목숨의 값어치를 내뱉는 사람도, 인간의 기만을 박애라는 사랑 아래 용서하는 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작년 여름은 유난히도 가뭄이 심각한 해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는 마을이었다. 24세가 되지 않은 처녀를 산에 보내고 대신관들이 일주일 내내 기도하면, 비가 온다나 뭐라나. 산으로 보낸 여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신이 기도를 들어준 것이고, 살아 돌아온다면 마녀가 신을 모독한 거라며 사냥했다. 웃긴 이야기였다. 기도한답시고 신관들이 들어간 신전에선 술 냄새가 끊이지 않고, 신관이랍시고 데려온 사이비는 신분이 불분명했다. 힘이 센 사람이 말하면 말하는 대로 믿어야만 하는 기이한 곳이었다.

 

소녀가 막 사람 말을 알아듣고 배워갈 5, 제물로 바쳐진 여자들은 마을을 구원한 성녀라는 이야기와 신의 신부로 결혼하러 간다는 동화를 읽었다. 어릴적의 소녀는 마을 축제와도 같은 기우제에, 여자가 산에 오르면 비가 내리길래, 정말로 하늘이 기뻐하는 줄 알았다. 나도 언젠간 신의 신부가 되어 마을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길 바랐다. 고립된 마을에서 만들어진 전통은 모두가 공유하고, 믿기에 쉬이 바꿀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았다. 산으로 올라가는 성녀는 기뻐하며 치장하고, 마을 사람들은 축복하며 응원한다. 마을에서 하는 작은 여름 축제의 기원었다.

 

비가 떨어지지 않던 봄과 여름 사이, 무더운 밤에 소녀는 마을 커다란 돌 뒤에서 수군대는 목소리를 들었다. 적당히 늙고 입 무거운 노파를 찾기 힘드니, 내년엔 더 먼 마을에서 신관을 데려오겠다는 이장의 너털스럽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운 기분이 들어 집으로 도망쳤다. 이불을 뒤집어쓰니 땀으로 흠뻑 젖었다. 더운 날 밤이었다. 엄마는 이불을 뒤집어쓴 소녀를 끌어안고 한참을 토닥여주었다. 엄마는 끊임없이 달래주듯 조언하듯, 잔소리 섞인 걱정스러운 어투로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하며.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 목소리.

 

다시는 들을 수 없지만, 괜찮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올해도 한 사제가 와서 가뭄이 내릴 터이니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돌아갔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늘에 제물을 바친다니 그런다고 비가 올까. 어쩌다 비가 내리는 날과 기우제를 하는 날이 맞았나 보지. 신이 있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성별을 따질 리도, 비를 내려주지 않을 리도 없을 텐데. 도망가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얼굴에 예쁜 분칠을 하고 고운 비단옷으로 지은 옷을 입고 하늘에게 비를 내려달라는 제물이 된 수많은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작년엔 마을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올해는 내가. 제물로 발탁됐다. 이장님이 갑자기 들어와 신에게 시집을 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무력감에 분노가 치밀어올렸다. 몇 번이나 도망을 시도했지만, 항상 잡혀 왔기에 포기했다. 이런 의미도 없는 풍습 같은 건 타파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똑똑하던 소녀. 더 많은 걸 배워 사람들이 멍청하기에 전통을 따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려 관뒀다. 작년에 성녀로 발탁된 언니가 산에 오르는 걸 말리지 못했을 때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보호자가 없는 내가 도망갈 곳이 없어 도피한 곳에서 다시 붙잡혀 끌려왔을 때도, 참을 수 없는 무력함이 몰려와서 지쳐갔다, 이젠 다 상관없었다. 사고를 멈췄다. 더 고민하고 싶지 않았어.

 

작년에, 날 보던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떠올랐다. 성녀로서 산에 오른다는 언니에게 다 헛소리라며 가지 말라며 옷자락을 붙잡았을 때 언니는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왜 그렇게 쉽게 체념해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말하고, 말해도 듣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 다 짜고 치는 거라며 신은 없고 기우제로 인한 비는 우연일 뿐이라고, 언니를 보내지 말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바라보던 차가운 눈초리를 기억한다. 알고 있으면서 묵인하는,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학습된 무력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물에 입까지 몸을 담갔다. 보글보글 숨을 내쉬었다. 쏴아 하는 물소리와 욕조에서 넘쳐흐르는 물을 가만히 바라봤다. 돌아갈 집도, 고향도, 친구도, 마을도, 가족도, 언니도,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들어와 있는 이 넓고 따스한 욕실과 물이 넘치는 욕조가 묘해.

 

손이 불어갈 때쯤 따끈따끈해진 몸으로 물속에서 나왔다. 보들보들한 수건으로 몸을 닦고 놓여있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조금 큰 셔츠와 잠옷 같은 바지였다. 가볍고 편한 데다 따뜻한 온기에 몽글몽글 기분이 들떴다. 인간이란 참 간사하구나. 물속에 있으며 고민에 잠겼으면서 따스한 분위기에 기분이 풀리다니. 낯선 사람의 집에 들어왔고, 이렇게 큰 저택에 사용인이 하나도 없다는 의문스러움도 괜찮았다. 나에게 해를 가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믿어야지. 밤이 깊어 갈 곳도 없으니 더욱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옷은 맞니?”

 

욕실에서 나와 거실로 나가니 책을 읽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쁜 금색 눈동자와 마주하니 조금 쑥스러워졌다.

 

좀 크구나?”

 

여자가 천천히 걸어 가까이 다가왔다. 목에 감싸고 있던 수건을 빼 머리에 얹고는 내 손을 잡고 소파로 끌었다.

 

머리는 말려야지, 감기 걸리잖니.”

 

여자의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에 닿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어주고 잠시간 기다리라며 자리를 떴다. 여자의 손길이 닿았던 목이 후끈했다. 다정함에 어색하게 목뒤를 만지고 있자 여자가 드라이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자는 마법을 쓰는 걸까. 전기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선 마력이 필요했다. 소녀는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마도구를 쓰는 모습에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눈을 깜빡였다. 여자는 눈치채지 못한 듯 소녀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위잉 거리는 소리가 거실을 울린다. 마법이구나. 하긴 이렇게 큰 저택을 평범한 사람이 혼자 관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여자는 마법사인 걸까. 마법사가 마탑도 아닌 외진 숲에서 혼자 살 수 있나. 마녀? 생각에 생각이 이어졌으나 머리에 부는 따뜻한 바람에 생각이 날아갔다. 드라이기의 미지근한 열, 부드러운 손의 감촉.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여자의 손이 떨어졌다. 드라이기를 끄고 정리하는 여자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소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고, 이내 여자도 표정을 정리했다.

 

늦었으니 일찍 자.”

 

여자는 2층 복도 중앙 화병만 놓여있는 테이블 옆 방에서 머무르면 된다고 알려주며 열쇠를 쥐여주었다. 여자의 흔들리는 시선은 소녀와 마주치지 않았다. 소녀의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소녀는 열쇠를 받아 들어 방이 있을 만한 곳을 생각했다.

 

내일 보자. 좋은 꿈 꾸고.”

안녕히 주무세요.”

 

여자는 도망치듯 거실에서 벗어났다. 소녀도 여자를 향해 인사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답하지 않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