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29)
03. 당신의 존재 (공포 6,748자) 03 햇빛이 눈꺼풀 위에 내려 천천히 눈을 떴다. 몇 시일까. 해가 뜰 무렵에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이 떠졌다. 중간에 깨지 않고 늦잠을 자본 게 얼마 만인지. 기분 좋은 이불이랑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으로 일어났다. 발바닥에 푹신한 카펫이 닿는다.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나가니 맛있는 냄새가 났다. 소녀는 허기진 배를 안고 1층으로 내려간다.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저택에 사용인이나 다른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다른 점이 없는 저택을 한 번 훑어보며 식당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식탁에 수프를 놓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소녀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일어났니? 깨..
02. 아무것도 묻지 않은 밤(공포 4,221자) 02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소녀를 욕실로 이끌었다. 역시나 넓은 방 하나 크기의 욕실이었다. 한 사람이 쓰기엔 과할 만큼 사치스러운 욕실. 금이 박힌 욕조에 따뜻한 물이 금세 차올랐다. 소녀는 여자가 준 옷과 수건을 옆에 놓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의 흰 발이 물에 잠긴다. 미지근한 공기가 닿았던 피부에 따뜻한 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물에 몸을 푹 숙인다. 욕조 옆으로 물이 흘러넘쳤다. 넓은 욕조에 홀로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천민은 아니었지만, 귀족도 아니었다. 소녀는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자랐고, 가끔은 궁핍해도 배곯은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힘들어지긴 했어도 돌아가시기 전 남겨주고 떠난 것들이 많아 괜찮았다. 마지막 말이 뭐더라. 지금 슬픔은 잠시뿐이야. 소나기 같은 슬픔..
01. 며칠만 재워주세요.(공포 4,481자) 비가 떨어진다. 창문을 매섭게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가 말소리를 좀먹는다. 가득 보이는 시야가 금빛으로 차올라서 눈이 먼다. 사랑 같은 건 하지 않겠다며 다짐하던 이날 밤에. 치기 어렸던 순수함으로 내뱉던 독기 어린 다짐은 네 품에 무너졌다. 손바닥을 그었다. 서로의 생명을 엮어서 계약을 맺었다. 네가 갖고 싶던 내, 염원이 허황된 바람이라면. 내가 가진 이, 감정도 헛될까. ** 어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 비가 오면, 너도 올까. 01. 며칠만 재워주세요.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며 밟혔다. 하늘하늘한 옷이 나뭇가지에 찢기고 얇은 단화가 벗겨져 발에 상처가 났다. 아직 박히지 않은 굳은살은 여린 살에 물집 잡혀 걸을 때마다 발목이 꺾이는 통증이 일었다. 달달한 분내에 벌레들이 꼬였다. 붉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