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129)
09. 가끔은 유치해도 (3,224자) 세리나가 미엘의 집에서 머물게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미엘은 일주일에 두세 번 외출하는 듯했다. 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있어서 이대로 살아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변하지 않고 재미없는 하루들의 반복이었다. 아침이면 미엘과 밥을 먹었고 혼자 산책했다.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세리나의 일과 전부였다. 미엘과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서로 할 말이 없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가 끝이었다. 둘 사이에 큰 관계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통성명하지 않았던 사이에서 이름을 아는 사이가 되었을 뿐이었다. 소녀는 저택에서 지내면서 고민했다.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삶이 싫지는 않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사랑을 알려주겠다 했지만, 이 흐릿한 감정을 어떻게 알..
08. 너 이름은 뭐니? (4,408자) 여자는 소녀가 지내는 방을 빠져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도착한 주방은 음식냄새가 가득했다. 입맛을 돋구는 음식 냄새에 토기가 일었다. 여자는 주방에 딸린 뒷문을 벌컥 열었다.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는 통을 열고 토를 쏟아낸다. 목이 걸걸했다. 맑은 침이 입가 주위로 떨어져 내려 헛웃음을 짓는다. 감정을 거래한 계약의 끝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은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존재지.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살아가고, 행복에 겨워 죽어버리기도 하니까.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복잡함, 갈망하게 되는 결핍. 사람은 빈 감정이 주는 공허를 견디지 못해 계속해서 어떤 감정으로 하루를 채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뭐지. 웃음이 나왔다. 계약. 말도 안 되는 계약은 신의 장난인가. 사람의 감정을, 사고팔..
07. 계약 (3,663자) 긴 잠에 빠져들었다. 소녀가 눈을 떴을 땐 비가 그친 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에서 눈을 든 소녀는 이틀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찌뿌둥했다. 엄청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졸음이 끝도 없이 잠이 밀려온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인다. 의식이 꺼지기 전 있었던 일을 가늠하듯 깜빡깜빡. 지난 일을 기억해보려는 노력도 잠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었다. 눈을 감고 있다 문득 이대로 잠들면 깨어나지 못할까 겁이 나 눈을 뜬다. 윙윙 울리는 머릿속을 무시하며 천천히 일어난다. “일어났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작은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덮은 여자가 느릿하게 침대 맡으로 걸어왔다. 소녀는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여자를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