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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저랑 계약해요. (4,801자) 소녀는 짐을 싸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소녀의 짐은 처음부터 없어서 떠날 짐도 없었다. 짐 정리가 어렵지 않았다. 여자가 첫날에 챙겨준 세안 도구와 수건,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모두 여자가 내어준 것들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많은 걸 가지고 떠나게 되는 기분은 이상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도 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짐 싸고 책 읽다 방에 오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굳이 사용인이 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켜지고 꺼지는 등불이 신기했다. 마력을 퍼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던 여자가 생각났다. 체력도 마력의 양도 어마어마한 거겠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여자가 생각났다. 떠나지 말라면 떠나지 않을 거냐 말하던 여자의 표정이 구슬퍼 ..
05. 저한테 왜 잘해주셨어요? (3,600자) 날이 밝아왔다. 소녀는 새벽에 봤던 여자의 표정이 떠올라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면서 식당으로 내려가 본 여자는 여전했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소녀를 맞았으며 소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음식의 맛 또한 변함없이 훌륭했다. 대화는 없었다. 둘 사이에는 공통된 대화 소재가 없었다. 간단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저택을 나섰다. 오늘도 소녀는 서재로 향했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을 무렵 소녀는 책을 얼굴에 덮었다. 눈을 감았다. 마을에서는 살기 위해서 살았다. 먹고, 자고, 그저 생을 연명하는 데 집중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은 지키지 않으면 다 사라져버릴 것들이었다. 이 저택에 온 이후론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았다. 하루가 평안했음을 안도하지 않아도 됐다. 하..
04. 나의 이유 (4,500자) 여자는 생각했다. 이 넓은 저택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눈을 감으면 밤이었고, 뜨면 아침이었다. 시간을 세지 않은 이후로는 하루하루에 계절이 바뀌었다. 어느덧 여자는 마지막을 생각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생일을 지나오면서 남은 건 공허였다. 내가 올해 몇 살이지? 매년 같은 날 다락방의 종소리가 울렸다. 생일이었다. 커다란 저택에 사람은 여자 혼자뿐이었다. 커다란 저택을 관리하기 위해 할 일은 많았지만 하나하나 다 챙길 필요는 없어서 마력으로 해결하거나 포기하다 보니 할 일이 없었다. 여자가 하는 일은 가끔 산책하기, 가끔 걷기, 가끔 책 읽기. 의미 없이 가끔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가끔이라는 단어는 이상했다.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날. 그렇지만 까먹지는 않을만한 기간. 가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