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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12. 고민과 편안한 밤 (5,212자)

얕은 마력으로 꽁꽁 둘러싼 미엘은 도시로 나왔다. 누구도 미엘을 알아보지 못했다. 흐릿한 인상으로 기억되지도 않을 껍데기를 만들어 뒤집어쓰고는 많은 인파 속을 걷는다. 스스로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수도에 자주 나오면서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미엘은 많은 시간을 방황하며 보냈다. 성인식이 지난 지도 두 세기가 지났다. 미엘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미엘은 얕은 마력 껍데기에 자신을 감추고 또 감췄다.

 

벨라에게 마력을 주고 거리에 나오면 항상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경험이란 평범한 사람이라면 겪어보지 못할 종류였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땐 알 수 없었던 시선이다. 우습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이 공허함이 밀려온다. 터덜터덜 인파 속을 걸었다. 대충 장보고 돌아가자. 맛있는 음식을 먹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하루 종일 잠에 든다면 괜찮아질 거야.

 

외투를 여미어 입었다. 따뜻한 햇볕이 몸속을 파고들어 뼈 사이사이가 시렸다. 우울한 기분에 침식당하지 않기 위해 오늘의 메뉴를 생각했다. 속이 좋지 않으니 스튜도 좋겠다. 달달한 음식을 먹을까. 저택에 있을 세리나를 생각했다. 삐쩍 마른 흰 피투에 가늘고 여린 팔목도 떠올랐다. 이제 막 성년이 되었을까. 저보다 한참 어릴 세리나는 뭘 알고 그렇게 당돌한 건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몸을 하고 안겨 왔다. 세리나의 몸은 너무나 작았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도록 흰 피부는 혈색이 돌지 않았다.

 

바람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이 앙상한 그의 체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고 여린 생물을 보는 보호자의 마음으로 세리나를 찌우고 싶은 욕구가 솟아났다. 매일 아침 제가 해준 밥을 오물오물 먹는 입이 떠올라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디서 저런 애가 왔는지, 두 눈을 똑바로 마주쳐 오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사랑을 알려주겠다며 머물게 해달라는 목소리가 당돌했다. 포동포동 하게 찌워서 건강하게 만들어버려야지. 그러고 보니까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도 모르네. 앞으로의 미래나 관계나. 불안감은 덮어두고 현재를 생각했다. 미엘은 가슴속에 간질간질함을 앉고 발걸음을 옮겼다.

 

**

 

오늘 아침도 오물오물 야금야금 입에 넣어 부지런히 먹는다. 미엘은 야무지게 먹는 세리나의 모습에 뿌듯해졌다. 본인이 한 음식은 본인이 먹을 줄만 알았지 남을 먹인 기억은 까마득하니 멀어 맛있게 먹어주는 세리나의 모습을 보니 요리가 더욱 즐거웠다. 먹이 주는 어미 새의 기분이 이럴까.

 

식사를 멈추고 세리나가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미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세리나는 여전히 열심히 먹는 중이다.

 

세리나. 좋아하는 음식이 뭐니?”

?”

좋아하는 음식 말이야.”

 

세리나는 미엘의 물음에 음식을 집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세리나는 미엘이 주는 식사가 황송했다. 돈 주고도 없어서 못 먹을 만큼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는 게 하루하루를 설레게 했다. 미엘이 세리나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나 물었을 땐 너무 정신없이 먹었나 싶어 부끄럽기까지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건 좋다. 밥을 많이 먹는 편이라 먹을 거라면 다 입에 넣었던 과거와 다르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서 저택에서의 식사시간은 하루 중 제일 즐거운 시간이었다. 즐거워 보이는 미엘의 표정을 보니 세리나는 머쓱해졌다. 너무 게걸스럽게 먹지 않았나, 너무 맛있어서 막 먹다 보니 보이는 모습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뒤늦게 입을 톡톡 닦고 빙그레 웃었다.

 

다 좋아해요.”

 

싫어하는 음식 없이 다 잘 먹는다. 미엘이 주는 음식이라면 뭐든 잘 먹을 것 같아서 다 좋아한다고 답했다. 너무 성의가 없었나 뭐라 덧붙이고 싶었지만 관뒀다. 더 먹고 싶은데 미엘이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봐서 괜히 부끄러운 기분에 포크를 들 수 없었다. 미엘은 새침하게 입을 닦는 세리나가 귀여웠다.. 쿡쿡 웃고는 포크를 들지 않는 세리나 앞으로 한 술도 뜨지 않은 제 그릇을 밀었다.

 

.. 왜 안 드세요?”

밥 생각이 없네.”

 

세리나는 머뭇거리며 미엘을 살폈다. 빙긋 웃는 미엘의 모습을 보고 천천히 포크를 들었다. 한 입 입에 넣었을 때는 역시 맛있어서 그만 먹으면 아깝다는 생각으로 다시금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

 

하루하루가 평탄하게 흘러갔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료한 하루다. 함께 밥을 먹고, 외출을 배웅하고, 서재에 틀어박힌다. 하루의 일과가 일주일이 되고, 이 주일이 되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세리나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본다,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사랑을 알려주겠다고 당당히말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게 무어라 딱 정해져 있는 형체도 아니라 무어라 정의 내리지도 못했다.

 

머무른다는 건 떠나기 전 잠시 멈췄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 저택에 잠시 머물게 된 이후로 모든 게 어긋나기는 했지만 나아가야 한다. 사실 앞으로의 계획이랄까 비전 같은 것도 없다. 그저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면 내일이 되어 있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잉여 시간에 생각이 많아지는 것도 지금껏 하루만 살아왔기 때문일 거다.

 

그렇지만 하루만 닥치는 대로 넘겨버리는 것도 가끔이지 매일이면 안 되었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에서 언제까지나 신세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저택에서 벗어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세리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럽고 독립적인 아이였다. 부모님 속을 썩이지 않은 착하고 똑똑한 딸. 어린 시절에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세리나를 사랑했고, 세리나가 영특하게 굴면 부모님이 좋아하며 기특해했기에 세리나는 징징대거나 칭얼거리지 않았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모습이 좋았던 어린아이였다. 그렇게 자라 성인이 된 지금 세리나는 홀로 살아가야 할 미래에 부모님이 생각났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미숙하고 어린 나이였다.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고 하지만 벌써 정들어버린 미엘과의 이별을 생각하면 서글퍼졌다. 게다가 떠날 땐 떠나더라도 사랑을 알려주겠다는 말은 지키고 가야 마음 편하게 인사하고 가는 건데, 나도 잘 모르겠다.

 

잘 다녀오세요. 라는 포옹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이란 게 뭘까. 조금 울적해졌다. 오지도 않은 미래는 불안했지만 불안한 미래 속에 곧 던져질 거란 당연한 사실이 더 괴로웠다. 안온한 일상을 누리기 위해 내 쓸모를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게 미엘에게 사랑을 알려주는 게 아니더라도 세리나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사랑. 사랑은 뭘까. 세리나가 사랑을 아나. 가족을 사랑했고, 친구를 사랑했긴 해. 그렇지만 그런 애정을 이론으로 꺼내기엔 자신조차 무어라 설명해내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이럴 때는 글로 배우는 연애 서적 같은 게 있었다면 한 번쯤 읽어봤을 텐데 미엘의 취향으로 이루어진 서재에는 그런 서적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았다. 간혹 로맨스 소설이 있기는 했다만 거의 필독서라 여겨지는 고전소설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세리나는 책을 읽는 미엘을 바라봤다. 동그란 은테 안경 밑으로 집중하는 미엘의 미간에 서린 그림자가 시선을 잡아 멍하니 바라봤다. 안경도 잘 어울린다. 글 읽을 때만 쓰는 건가, 시선을 느낀 미엘이 세리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괜히 찔린 세리나가 헛기침하곤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엘은 세리나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따가웠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입을 열지는 않는다.

 

무슨 일일까. 유추되는 일도 없어서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리나는 의식적으로 이쪽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지 어색한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이 마주친 이후로 한 번도 넘어가지 않은 세리나의 책 페이지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세리나가 보는 책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은색 머리카락이 책 위로 흘러내렸다. 세리나는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미소를 띠고 있는 미엘의 얼굴이 보였다. 미엘의 긴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향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또다시 시선을 빼앗겼다. 세리나는 한참 동안 미엘의 얼굴을 바라본다. 시선이 얽혔다. 미엘의 긴 속눈썹이 깜빡였다. 세리나는 아차 싶어 책으로 시선을 떨궜다.

 

세리나, 내용이 많이 어렵니?”

 

바로 귓가에서 미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책의 옆면을 문지르다 종이 날에 베일 것 같아 멈춘다. 세리나는 미엘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어떤 말로 입을 열까 입술을 옴짝 달싹거렸다. 세리나는 미엘의 눈치를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사랑을 알려주겠다 하지 않았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리나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과 동거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다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거겠지. 유한하던 시간이 무한으로 늘어났다는 데에 대한 부담도 있을 테고, 미엘이 어렸을 적 고민했던 고민을 비슷하게 하고 있을만한 세리나를 보며 웃음을 삼킨다. 집안일은 마력으로 해결하고, 요리야 취미니, 세리나에게 부담을 줄 일이 하나도 없는걸. 조그만 머리통으로 무슨 고민을 하는지 뻔히 보였지만 구태여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미엘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혹시 자신이 없니,”

그럴 리가요.”

 

세리나가 피식 웃고는 책을 덮고서 미엘을 올려다보았다. 세리나의 검은 눈동자가 미엘을 직시했다. 미엘은 세리나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다. 흔들릴지언정 견고함을 가진 새까만 눈도 마음에 든다. 미엘은 세리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미엘의 온기에 세리나가 숨을 참았다.

 

작고 여린 생명체가 미엘의 품속에서 꼼지락거렸다. 세리나는 미엘에 비해 체구도 키도 작았다. 미엘의 옷을 입으면 품이 좀 남았다. 한품에 쏙 들어오는 세리나를 안으면 온기와는 다른 따뜻함으로 채워진다. 세리나가 미엘을 마주 앉고는 미엘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미엘은 세리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는 낮게 물었다.

 

세리나, 왜 이렇게 귀엽게 굴어?”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래도 가끔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가령 미엘이 끌어안아 오는 품에는 다정함이 가득하다거나 지금 나를 위로해주고 싶어 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세리나는 얼굴에 작은 흐릿한 미소를 머금고 미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냥요, 애교 부리면서 끼 좀 부려볼까 하고요.”

미엘은 세리나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타닥타닥 타는 장작 소리, 째깍거리는 벽시계, 채광 좋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구름의 그림자들만 아니었더라면 시간이 멈췄다고 생각할 만큼 고요하고 편안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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