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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13. 비가 내릴 것 같네.(5,100자)

나왔어

 

미엘은 문 앞에 서 있는 세리나를 보며 웃었다. 세리나가 미엘을 보며 팔을 벌린다. 미엘이 세리나의 팔 위로 팔을 걸치며 끌어안았다. 외출하고 온 미엘에게선 은은한 나무냄새가 났다. 아침에 뿌린 향수 향이 날아가면 밖에서 묻어온 향인 건지 체향인지 모를 향이 섞여서 났다. 더운 여름, 세리나에게선 산뜻한 향이 났다. 미엘은 세리나를 강하게 한 번 끌어안고 놓아준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

많이 기다렸어?”

 

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엘이 빙긋 웃으며 세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 며칠 저택에 돌아오는 시간이면 세리나가 나와 미엘을 반겼다. 싫은 기분은 아니라 거부하지 않았지만 나가는 날이면 꼬박꼬박 나와서 반겨주는 게 어떻게 알고 나오는지, 하루 종일 밖에만 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때그때 나와 안겨 오는 게 좋았다. 텅 빈 집에 홀로 들어오면 반기던 적막감을 잊어갔다. 지쳐 문을 열면 바로 들리는 세레나의 오셨어요? 한마디. 세리나의 얇고 가벼운 목소리는 진중한 톤에 안정감이 있어 듣기 좋았다.

 

세리나는 저택을 돌아다니며 미엘을 바라봤다. 굳이 보려 하지 않아도 시선을 끄는 사람이다. 미엘이 지나가면 살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아침을 먹고 뒷정리를 끝마치고 나갈 준비를 하는 미엘의 모습은 분주했다. 미엘은 11시쯤 나가 4시쯤 돌아온다. 미엘은 마중 나오는 세리나에게 자신이 올 시간을 어떻게 알고 나오냐 물었지만, 규칙적으로 사는 미엘의 생활방식은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무슨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날을 시간 맞춰 나가고, 제시간에 돌아왔다. 처음부터 미엘을 기다리려는 의도는 없었다. 책을 읽다가 밖에 나오면, 돌아다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이 많아지는 때면 보던 창밖에 미엘이 보였다. 후에는 미엘이 내는 금빛 마력으로 알았다.

 

마법사는 마법을 쓰면 주위에 눈송이 처음 은은한 마력이 흩날렸다. 미엘의 마력은 금빛이었다. 모를 수도 없고, 눈을 뗄 수 없는 색이었다. 창밖을 봤을 때 보이는 금빛으로 미엘이 돌아왔음을 알았다. 세리나가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 보면 숲 어딘가 금빛 마력이 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겨울도 아닌데 송이송이 퍼지는 금빛 알갱이들.

 

처음엔 정말 미엘이 돌아오는 건지 궁금해서 정문으로 내려왔다가 미엘과 눈이 마주쳤다. 문 앞에서 마주친 미엘의 표정이 당황스러워 보여 나도 모르게 가서 안겼다. 아무리 같이 지내는 동안, 아침을 제외한 시간에 마주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해도 저렇게 놀랄 일인가. 세리나가 고개를 꾸벅이며 물었다.

 

잘 다녀왔어요?

 

세리나는 아침을 제외하곤 식사를 마다했다. 끼니를 잘 챙기지 않는 모습이 걱정되었다. 밥을 삼시세끼 잘 먹어야 하는데. 아침은 차고 넘치게 잘 먹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안심했다. 미엘 또한 식사를 챙기는 편은 아니었다. 굳이 식사하지 않아도 허기가 지지 않아 음식을 섭취할 이유가 없었다. 세리나에게 재차 저녁을 권유했을 땐 책을 마저 읽겠다며 거부했다. 미엘도 세리나가 하루, 이틀, 일주일 식사를 거부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세리나와 미엘은 미엘이 외출하지 않은 이상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보다 너른 서재에서 작가도 기억나지 않을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세리나는 잠을 자는 시간이 아니라면 항상 서재에 있었다. 어떨 때는 군사학, 어떨 때는 행정학, 어떨 때는 소설, 책장에 꽂혀있는 모든 책을 다 읽어보려는 것처럼 하루 종일 서재에만 있었다. 미엘은 그래도 행동반경이 넓은 편이었다. 아침에는 요리했고 화단을 관리하고 책을 읽다 산책도 했다. 세리나는 지박령마냥 서재 한구석에서 가만히 앉아 책을 쌓아갔다. 서재와 주방에서만 만난 세리나를, 현관에서 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사람이 반겨주는 현관은 어색했다.

 

세리나와 현관에서 처음 마주친 날. 평소처럼 벨라에게 마력을 나눠주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세리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를 가는 길이니? 왜 여기 있니? 묻고 싶은 말이 많아서 눈만 깜빡였다. 저택에 다른 사람이 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이 돌아다니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서재에 있어야 할 세리나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도 새로웠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미엘이 긴 속눈썹 움직여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세리나가 천천히 걸어와 폭 안겼다. 사랑의 포옹이에요.. 하며 웅얼거리는 세리나. 미엘이 세리나를 내려다본다. 세리나가 맑은 눈을 깜빡이며 잘 다녀왔냐며 미엘을 바라봤다. 미엘은 그런 세리나를 마주 안았다. 수도에 한 번 다녀오면 모든 기력이 빠져나갔다. 집에 돌아오면 무기력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만 잤다. 수도엔 모르는 척하며 두고 온 기억들로 가득했다. 차라리 마력이 부족해 피로를 느끼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세리나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라 무너지는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피곤하네.”

 

세리나는 미엘의 표정이 궁금했다. 피곤하다고 말하는 미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세리나는 미엘의 등을 끌어안았다..

 

충전해 줄게요.”

 

따뜻한 세리나의 체온이 가깝게 느껴졌다. 한품에 안길 만큼 작으면서 감싸 안겠다며 안아오는 팔이 단단했다. 세리나는 이날 이후로 미엘을 마중 나왔다. 저택 내에서 할 일도 없었고, 외출하여 돌아오면 유독 피곤해 보이는 미엘이 눈에 밟혔다. 미엘은 세리에에게 굳이 나와 반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세리나는 애교스러운 투로, 아침에만 사랑의 포옹을 하는 건 반만 사랑하는 느낌이에요. 라며 밤 인사도 하게 해달라 말했다. 우스운 이유였다. 애교스럽게 말을 덧붙이는 세리나가 귀여워 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전이라며 아침보다 강하게 안아오는 포옹도 좋았다.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던 무수한 생각들이 날아가는 듯했다. 단단하게 끌어오는 팔에 안정감이 느껴져 그러는 건지. 단호하고 다정한 세리나의 말투 때문인지.

 

**

 

날씨가 더워지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외투를 입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더니 이젠 밤에 이불을 걷어차야만 잠들 수 있었다. 올해 장마는 유난히도 길다. 어젯밤은 새벽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에 들었다. 아침에 땀범벅으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땅이 평소보다 축축했다. 세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장마의 끝 무렵일까. 후덥지근하면서도 꿉꿉한 장마가 지나가고 있었다.

 

세리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컨디션이 축 떨어져 암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싫고 좋고를 떠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세리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치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눈을 꼭 감고 바들대며 반짝이는 번개를 애써 무시했다. 세리나가 살던 마을은 비가 자주 내리지 않았다. 세리나가 갓 태어났을 때는 축복받은 날씨와 기온으로 부유한 마을이었다는데, 세리나가 아장아장 걷고, 학문을 떼기 시작할 때쯤부터 비가 조금씩, 조금씩, 덜 자주 내렸다.

 

어렸을 때는 비가 오는 날이 좋았다. 집 안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맞으며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부모님이 오길 기다리는, 고민이 없는 삶. 자라며 비가 오는 날이면 하나둘 좋지 않은 일이 생겨 하나의 징크스가 생겨버렸다. 한두 번이면 우연이지. 반복되면, 우연이라 할지라도 생겨버린 징크스에 기분을 띄울 수가 없었다. 비가 오지 않길 바랐다. 비가 싫었다. 삼재처럼 여겨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사람을 놀리듯,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우두둑 떨어져 어깨를 적셨다. 비가 그치면 꿉꿉하게 남은 곰팡내가 배어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밥을 먹던 미엘이 포크를 내리고 창밖을 바라본다. 어두침침했다.

 

비가 내릴 것 같네.”

 

미엘이 입을 열었다. 세리나는 식사를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먹구름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세리나는 아침부터 가라앉던 기분이 더 깊은 곳으로 축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포크를 들었다 음식을 집지 못해 놓았다. 미엘이 세리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인다.

 

더 안 먹니?”

 

세리나가 식사를 남기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원채 많이 먹는 편이기도 하고, 남긴 적도 한 번이 없었는데. 몇 입 먹지도 않은 식사를 전부 남겨버리니 걱정이 되었다. 세리나는 미엘의 시선을 피하며 속이 좋지 않았고 그릇을 치웠다. 세리나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미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세리나를 바라봤다.

 

오늘은 마탑으로 가야 하는 날이었다. 평소처럼 규칙적으로 저택을 벗어나서 벨라와 시간을 보내고 찬거리를 사 와 돌아와야 하는데, 세리나의 상태가 눈에 밟혔다. 미엘은 세리나가 책을 읽는 서재에서 서성이며 세리나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세리나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가봐야 하지 않냐고 물었지만, 미엘은 괜찮다며 두꺼운 책 한 권을 골라 와 소파에 앉았다. 읽히지도 않은 책을 한 장씩 넘겼다. 미엘은 세리나의 표정을 훔쳐봤다. 세리나는 미엘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은지 무슨 생각인지 모를 표정으로 책을 읽었다.

 

미엘은 곤란한 마음으로 벨라를 생각했다. 그래도 벨라 정도 되는 마력이라면 스스로 효율적으로 마력 사용을 절제하겠지. 일단은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세리나가 걱정되어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미엘이 세리나의 옆에서 아무리 신경 써서 먹이고 주의 깊게 보아도 나아지지는 않았다. 세리나는 호들갑스럽게 구는 미엘을 보면서 왜 그러냐고, 자신은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 웃었지만, 그렇게 걸리는 입꼬리에 미소마저도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만 같아서 미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며칠이 지나도 세리나의 표정이 괜찮아지지 않았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거냐 물어도 괜찮다고 답했다.

 

표정이 나아지지 않는데 어디가 괜찮은 건지. 무슨 일인지. 세리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미엘은 그러다 문득 자신이 세리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둘의 관계나 행동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미엘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세리나를 걱정한 지도 일주일 하고도 사흘. 오늘만큼은 벨라에게 찾아가 봐야 하는 걸 알면서도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외출을 준비했다. 나 진짜 나간다? 다녀온다? 세리나에게 물었다. 세리나는 미엘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미엘의 등을 밀었다. 정문에서 떨어지지 않던 발이 세리나의 등살에 밀려났다. 괜찮다고, 잘 있을 테니 걱정 없이 다녀오라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미엘은 가슴 한편 찝찝함을 안고 저택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