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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15. 반복되고 변하지 않을 무언가

“우유라도 한 잔 타올게.”

세리나에겐 안정이 필요했다. 서재의 긴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세리나를 끌어안고 있던 미엘은 세리나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미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세리나를 슬쩍 밀었다. 세리나가 미엘의 팔을 잡았다. 세리나의 축 처진 눈매가 붉어져 있었다. 세리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절대 울지 않았다. 흑단 같은 긴 머리카락이 시트에 흘러내렸다. 세리나는 미엘도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가지 마세요...”

비가 내리던 하늘은 어두워 낮인지, 밤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채광 좋은 창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달만이 밤을 알리고 있었다. 길게 내리비치는 달빛이 세리나의 얼굴을 비춰다. 장작이 타는 벽난로의 따스한 빛과 달이 비추는 차가운 빛이 세리나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어냈다. 세리나가 눈을 깜박이면 긴 속눈썹도 함께 움직였다. 힘껏 짓이겨진 입술이 붉었다. 세리나의 푸른 눈은 깊은 바다와 같았다. 세리나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미엘은 달에 구름이 드리워 세리나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서야 정신을 차렸다.

미엘은 세리나의 붉은 눈가를 쓰다듬었다. 미엘이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미엘의 손 주위에 금빛 마력이 흩날렸다. 흩날리던 마력이 천천히 퍼지며 주변 작은 촛불들에 잔잔한 불빛이 붙었다. 주변이 더욱 환해졌다. 일렁이는 촛불의 따뜻한 불빛이 미엘과 세리나의 주위를 감쌌다. 세리나가 미엘의 품에 기댄다. 미엘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미엘이 세리나를 안고 있던 자세를 고쳐 끌어안는다. 세리나는 미엘의 품에 파고들었다.

“저는 비 오는 날이 싫어요.”
“그런 것 같네.”
“왜 싫은지는 안 물어보세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걸.”

미엘이 세리나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안쓰러웠다. 놀라 헐떡이던 숨을 내쉬며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세리나가, 가녀린 몸으로 안겨 오던 몸이 안타까웠다. 사람은 고작 가벼운 이유 하나만으로 무언가를 증오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인생, 삶 전채를 송두리째 바치기도 한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고 살아가는가. 비를 무서워하는 세리나는 비가 아닌 미엘은 모르는 다른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떠는 걸 테지만 그 깊이는 미엘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알 일은 없을 테고, 세리나가 설명해준다고 하여도 미엘이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은 닮고도 달랐다.

미엘은 제 품에서 숨을 고르는 세리나를 한참 동안 토닥거렸다. 미엘은 사람일까. 언젠가 벨라가 그랬다. 마법과 마술은 비슷하고 다르다고. 그리고 마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모든 사람은 현상을 계산하고 관찰해서 마력과 유사하게 따라 할 수 있다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연설을 늘어놓던 벨라를 미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열심히 말하고 설명하는 벨라 가 반짝여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다. 이제 와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세리나는 사람일까. 마물일까.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건 어떤 걸까. 닮고, 따라 하고, 비슷한 것들은 원래 있던 걸 대체할 수 있을까? 그러면 원래 있던 것들은 사라지고 불필요해지나? 아니면, 원래 있던 것과 같은 이름이 되나? 이상했다. 태어나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지독히 외로워, 타인과 붙어 있다는 게.

세리나... 나도 너에게 내 전부를 말해줄 순 없어, 너도 그러겠지. 그저 옆에 있을게. 괜찮아질 때까지 안아줄게. 미엘이 세리나의 둥근 머리를 쓰다듬다 밤보다 검은 세리나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미엘의 입술이 닿는 감촉에 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미엘을 바라본다. 미엘과 눈이 마주쳤다. 세리나가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미엘의 따뜻한 호박색 눈동자가 타오르는 장작에 더 붉었다. 뒤늦게야 미엘에게서 축축한 비 냄새가 맡아셨다. 미엘의 머리끝, 덜 말라 걸려있는 빗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세리나는 미엘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다. 눈을 감는다. 미엘의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세리나의 귓가에 울렸다. 두근, 두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건,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인을 줘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미엘의 심장 소리가 그러했다. 두근, 두근. 당신은 반복되고 변하지 않을까.

비슷하고 다른 단어들은 왜 비슷한 발음을 띄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나무가 타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마법이랑 마술이랑. 반복이랑 변화랑. 사람이랑 사랑이랑. 말장난이었다. 세리나는 변화가 싫었지만, 살던 대로 그대로 살아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매일 한 걸음씩 나아가야 했다. 가끔은 그게 벅차면서도 멈춰 서 있는 자신이 싫었다. 모순으로 가득 찬 마음이었다. 세라나는 미엘이라는 여자가 기이하고 이상하고 기묘하고 편하며, 불편했다.

미엘은 무슨 마음이었기에 비를 맞으며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자신을 끌어안아 준 걸까. 한나절이 지나도록 토닥여주며 날 동정해주는 걸까. 무슨 마음이기에. 사람은 왜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안다고 착각하고 통제할 수 있다 판단하고 사랑하며, 분노하는 걸까. 어려웠다. 세리나는 말라 체온이 식은 미엘의 품이 따뜻했다. 미엘의 손의 토닥임, 심장 소리. 타는 소리. 토닥토닥, 두근두근, 타닥타닥. 이 단어들도 비슷했다. 비슷한 모양이었다. 세리 나가 작게 물었다.

“오늘, 왜 비를... 맞고 오신 거예요?”

미엘의 품에 세리나의 목소리가 묻혔다. 미엘은 세리나를 토닥이며 말했다.

“우산을 두고 가서.”

목소리가 다정했다. 세리나는 할 말이 없었다. 거짓말, 저번엔 비같은 건 맞아도 하나도 안 젖었으면서, 세리나는 대답 대신 미엘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미엘이 세리나와 눈을 맞췄다. 세리나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미엘의 양 뺨에 손을 올렸다. 세리나의 손이 따뜻했고, 미엘의 뺨이 차가웠다. 미엘은 세리나의 손길에 두 눈 접어 사르르 웃었다. 녹을 듯 단 미소였다. 세리나가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입이 맞추고 싶었다.

세리나가 미엘의 옆 머리카락에 걸린 물방울을 검지로 건드렸다. 빗방울이 세리나의 검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세리나의 눈동자가 검지에 묻어 사라지는 방울을 따라간다. 긴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빗방울의 흔적이 말라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세리나가 입을 열었다.

“감기 걸리잖아요.”
“난 마녀라 감기 같은 건 안 걸리는데?”

미엘의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 둘의 대화가 겉돌고 맴돌았다. 걱정하며 물어본 말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뻔뻔하게 대답하는 미엘은 다정한 사람이지. 미엘의 다정함을 생각하다 기분이 일렁거렸다. 미엘의 쿡쿡 웃는 웃음소리가 세리나의 귓가에 맴돌았다. 미엘의 뺨에서 떼지 못한 손의 온기가 미엘의 뺨에 빼앗긴다. 세리나가 눈동자 굴려 미엘과 눈을 마주친다. 세리나의 검은 눈동자가 밤에 깔린 어둠에 깊어져 있었다. 미엘의 눈동자는 불빛에 깊어지고, 세리나의 눈동자는 어둠에 깊어졌다. 깊어진 눈동자에 서로의 얼굴이 담겼다. 눈썹부터 눈동자와 콧대. 입꼬리와 입술. 그리고 다시 속눈썹과 아직 남아있을 것 같은 네 뺨의 솜털까지. 꿈을 꾸듯, 몽롱한 듯. 세리나가 느리게 툭, 묻는다.

“...입 맞춰도 돼요?”

미엘의 따뜻한 품에서 뺨을 마주 잡은 두 손. 마주 보는 얼굴의 거리가 가까웠다. 장작이 붉게 타올랐다. 세리나의 등 뒤에서 타오르는 불빛에 미엘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세리나가 눈동자만 굴려 미엘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작게, 아주 작게 변명하듯 덧붙인다.

“그냥.. 그냥.. 고마워서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묻고 싶기도 했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 다른 사람을 평생 가도 알 수 없다는 게 의문이었다. 세리나의 짧은 인생 앞에 마주친 미엘이라는 여자는 세리나가 아무리 눈을 맞춰도 무슨 생각인지, 마음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이해하는 덴 뭐가 필요할까. 필요한 재료만 딱딱 가져와 적혀있는 과정만 따라 하면 완성되는 요리처럼. 사람을 파악하는 방법이 적힌 레시피가 있으면 좋겠다. 미엘이 세리나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다. 미엘이 눈을 감는다. 미엘의 긴 속눈썹이 세리나의 눈동자에 맺힌다. 미엘이 느리게 눈을 뜨며 세리나와 시선을 맞춘다. 미엘의 고개가 틀어진다. 세리나가 눈을 감는다. 입술이 겨쳐진다. 온기를 빼앗긴 미엘의 차가운 입술이 세리나의 입술에 닿았다. 온기를 빼앗기고선 추워하지도 않고 입을 맞춰오는 마음은 무엇인지. 둘은 알 수 없었다.

걱정시킨 마음이 미안해서 걱정되고, 그런 마음이 걱정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이상한 문장이다. 걱정해서 걱정하고, 그래서 또 걱정하고. 우리는 이걸 한 단어로 신경 쓰인다고 축약하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 미안해서 미안한데. 미안하게 한 마음이 미안한 그런 마음. 타인을 깊게 생각하다 섣불리 판단해버리는 마음도 다정함이라 말해도 되나. 당신의 걱정이 미안해, 당신의 미안함이 걱정돼. 난, 그런 당신이 다정하다고 생각해. 다정한 여자. 난 무슨 마음으로 당신에게 입을 맞추자 하고,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입을 맞춰준 건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벽난로가 일정이고 긴 달빛이 창을 통과하는 밤. 땅을 적시는 빗소리가 멎을 줄 몰라 조그마한 서재에 갇혀 버린 둘의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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