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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14. 정답같은 말(4,264자)

유난히 타이밍이 안 따라주는 날이 있다. 빨리 세리나에게 가보고 싶은데 오늘따라 벨라가 늦는다. 벨라는 항상 미엘을 기다리게 했다. 제가 오는 시간을 알면서도 항상 벨라는 자리에 없었다. 일이 바빠서라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반복되는 기다림이 길어짐을 알면서도 미엘은 기다렸다. 미엘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다. 한때는 벨라에게 자신이 오는 날은 빨리빨리 오라는 말을 꺼내볼까 했으면서도 벨라의 피곤한 표정과 눈 밑 다크서클을 보면 생각해놓은 잔소리는 저 멀리 들어가 버렸다. 약속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시간은 남아도니까. 기다리는 일이 문제가 되지는 않지. 아무리 긴 기다림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늘만큼은 조급해서 시선이 시계를 쫓았다. 조급한 마음이 숨겨지지 않았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론에게 물었다, 벨라는 언제쯤 온대?

 

오늘은 좀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평소라면 책장을 기웃거렸겠지만, 오늘은 마음이 급했다. 소파에 앉아 손목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음은 이미 저택이었다.

 

투둑, . 한 가닥 한 가닥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렸다. 정오가 그다지 지나지 않았는데도 곧 해가질 듯 날이 흐리다. 무언가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았다. 톡톡 가늘게 창문을 두드리던 빗줄기가 굵어졌다. 미앨은 숨을 참았다. 심장이 철렁했다. 비가 와서 아랫입술을 물었다. 미엘은 우산이 없어도 젖지 않았지만, 맨살이 보일 정도로 비에 담가졌던 세리나가 떠올랐다. 마음이 급해졌다. 비가 내렸다. 세리나의 좋지 않던 표정도 요 며칠 음식을 잘 먹지 못했던 것도 혹시 비가 올 것 같은 하늘 때문이었나,

 

세리나와 계약을 처음 했던 날이 반사적으로 연상되었다. 설마설마했다. 혹시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걸까. 비가 와서, 비가 내릴 것 같아서 그랬던 걸까. . 비가 뭐라고.

 

그냥 저택으로 돌아갈까.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벨라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미엘은 문을 열고 벨라의 팔을 잡고 끌어와 문을 닫았다. 놀란 벨라를 뒤로한 채 벨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미엘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술식을 정리하여 읊고는 손을 떼어냈다. 미엘의 금빛 마력이 손에서부터 빠르게 퍼져나가 벨라를 감쌌다.

 

, 잠깐.. .. !”

 

벨라가 아픈 신음을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벨라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금빛 마력이 벨라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미엘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벨라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 미엘! 부르는 벨라를 돌아보고 가볍게 웃어주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미안, 먼저 가볼게.”

 

벨라가 눈을 깜빡이며 눈을 떴을 때 미엘은 사라진 상태이었다. 눈처럼 내려앉아 녹아내리는 금빛 알갱이만이 미엘이 다녀왔음을 알렸다. 폭풍이 지나간 듯 정신없던 대마법사실에는 어리바리하여 굳어있는 벨라 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벨라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엘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주무르곤 어정쩡히 서 있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미엘... 미엘의 이름을 낮게 읊조리곤 제 발끝을 바라본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인사도 안 하고 사라질게 뭐야... 벨라는 한동안 미엘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다 소파에 풀썩 앉아 등을 기댔다. 갑작스레 밀려 들어온 미엘의 마력이 어지러웠다. 벨라는 긴 숨을 내쉬었다.

 

미엘은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미엘은 벨라가 자신의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무리하지 않도록. 기분이 간질거릴 정도로 벨라의 안색을 살피곤 했었다. 오늘은 뭐야. 벨라가 피곤한 미간을 꾹꾹 누른다. 도움받는 입장에서 뭐라 말할 입은 없다만 서운한 감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서운하다고 징징댈 상대도 없는데..

 

어이가 없네."

 

허탈한 벨라의 목소리가 허공에 퍼진다. 심장에서 아리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미엘과 벨라의 마력 상정은 정말 최악이라 할 정도로 맞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미엘도 알고 있었고, 벨라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력 이식은 목숨이 간당간당할 정도로 위험도가 높아 모두가 꺼렸다. 피를 수혈하듯 위급한 상황에서 절박할 때만 안전에, 안전을 기하며 외워야 할 술식을 저리 쉽게 읊고 사라져버린 미엘의 능력은 감탄스러웠다. 벨라는 숨을 골랐다. 질투인지 짜증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복합적인 감정이 미엘의 마력과 섞여 넘실거렸다.

 

**

 

비가 내렸다. 세리나는 커다란 방 한가운데 커다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돌돌 말아 뒤집어썼다. 오늘따라 방이 유독 크고, 침대가 넓었다. 한기가 바닥에서부터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세리나는 이불을 파고들었다. 몇 시인지. 며칠인지. 모르겠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미엘이 저를 걱정하느라 외출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유난히도 신경 쓰고 챙긴다는 걸 느꼈다.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남을 신경 쓰이게 하는 게 탐탁지 않았다. 사람은 혼자 살 줄 알아야 한다. 고작 비가 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약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비가 그칠 텐데. 할 수 있는 일도, 할 일도 없었다. 세리나의 하루는 공허였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멈춰있는 저택에서 멈춰 살아있는 세라나. 쉼없이 떨어지는 비가 창문을 두드려, 시간이 가고 있다고 끊임없이 복기시켰다. 잠에 들어서, 빗소리를 듣지 못하면 괜찮아질까. 오늘의 하늘은 평소보다 더욱 어두웠다.

 

미엘이 떠나간 저택. 홀로 남은 집.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저택을 나서지 못하는 미엘을 잡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후면 비가 내릴 듯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이 어두워서 미엘의 옷자락을 붙잡고 싶었다. 나갈 준비를 하는 미엘의 깔끔한 향수 냄새가 어른스러워서 세리나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가 뭐라고. 세리나는 미엘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고 징징댈 만큼 어린애도 아니었다. 미엘을 배웅하고 책을 읽으려 서재에 들어왔지만, 글을 읽을 수가 없어서 방으로 들어왔다. 세리나는 이불을 끌어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불안한 마음은 잠이 들지 못하게 했다. 미엘이 나간 이후로 침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잠들지 못했다. 결국 병아리 눈물만큼 떨어지던 빗줄기가 굵어져 창문을 때렸다. 빗소리가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같았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어. 누가 보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꼭 끌어안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 따뜻하게 안아줘, 제발. 번개가 내리치면 딸꾹질이 나왔다. 햇빛이 구름에 가려져 밤처럼 어두운 방에 세리나 혼자 있었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침대 위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이 세상에 혼자 남아서 아등바등 살고 싶다고 버티는 꼴이 추했다.

 

대마법사실에서 나온 미엘은 황급하게 귀가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뇌 한구석으로는 술식을 읊고 한 구석으로는 세리나를 생각했다. 혹시 전처럼 비를 맞고 떨고 있을까. 비 오는 날 마주친 세리나는 유난히도 약해 보였다.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장난감처럼 울음을 가득 담긴 눈으로 미엘의 옷깃을 잡아 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새하얘지도록 미엘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주름이 져가는 미엘의 셔츠엔 세리나의 손자국이 남았다. 그 손동작이 애처로워 미엘은 세리나를 품에 안았다. 미엘은 마음이 급했다. 머리에 떨어지는 비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춥지도 않았다. 비에 젖은 옷이 축축해졌다.

 

세리나 생각뿐이었다. 비가 옷을 적셨다. 빗줄기가 굵어져 몸에 한기가 들었다. 저택의 문이 열렸다. 세라는 일찍 귀가한 미엘을 보며 눈동자가 커져션 오늘은 일찍 왔네요? 하며 물었다. 세리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리나가 미엘을 바라본다. 미엘은 세리나를 끌어안았다. 세리나가 놀라 숨을 멈췄다. 미엘의 온기가 훅 끼쳤다. 세리나는 미엘의 행동에 굳어 미엘을 마주 안지도 못하고 멀뚱히 숨 쉬는 소리를 죽였다.

 

세리나, 괜찮아?”

 

미엘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 세리나의 숨이 툭 떨어진다. 미엘의 손이 세리나의 등을 쓸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말해주는 미엘의 목소리에 빗소리가 잠잠해졌다. 빗소리가 미엘의 목소리에 묻혀갔다. 미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세리나의 심장박동이 천천히 안정적으로 뛰었다. 무슨 생각을 해야 정답일까. 연극 무대 같은 저택에서, 내가 무슨 생각인지, 왜 이러는지도 모르면서 정해진 대답처럼. 다 안다는 듯이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는 미엘은 무슨 생각일까. 미엘의 괜찮다는 말에 괜찮지 않아졌다. 흔들리던 감정이 잡혀가며 풀어졌다. 세리나가 느리게 손을 올려 미엘을 마주 안았다. 미엘의 등이 비에 축축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인정하기 싫은 말을 반복하는 당신이 왜 괜찮다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도 기이할 정도로 위로가 되는 말의 무게가 무거워 세리나는 미엘의 품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