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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제목미정(GL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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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반복되고 변하지 않을 무언가 “우유라도 한 잔 타올게.” 세리나에겐 안정이 필요했다. 서재의 긴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세리나를 끌어안고 있던 미엘은 세리나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미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세리나를 슬쩍 밀었다. 세리나가 미엘의 팔을 잡았다. 세리나의 축 처진 눈매가 붉어져 있었다. 세리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절대 울지 않았다. 흑단 같은 긴 머리카락이 시트에 흘러내렸다. 세리나는 미엘도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가지 마세요...” 비가 내리던 하늘은 어두워 낮인지, 밤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채광 좋은 창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달만이 밤을 알리고 있었다. 길게 내리비치는 달빛이 세리나의 얼굴을 비춰다. 장작이 타는 벽난로의 따스한 빛과 달이 비추는 차가운 빛이 세리나의 얼굴에 음영을 ..
14. 정답같은 말(4,264자) 유난히 타이밍이 안 따라주는 날이 있다. 빨리 세리나에게 가보고 싶은데 오늘따라 벨라가 늦는다. 벨라는 항상 미엘을 기다리게 했다. 제가 오는 시간을 알면서도 항상 벨라는 자리에 없었다. 일이 바빠서라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반복되는 기다림이 길어짐을 알면서도 미엘은 기다렸다. 미엘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다. 한때는 벨라에게 자신이 오는 날은 빨리빨리 오라는 말을 꺼내볼까 했으면서도 벨라의 피곤한 표정과 눈 밑 다크서클을 보면 생각해놓은 잔소리는 저 멀리 들어가 버렸다. 약속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시간은 남아도니까. 기다리는 일이 문제가 되지는 않지. 아무리 긴 기다림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늘만큼은 조급해서 시선이 시계를 쫓았다. 조급한 마음이 숨겨지지 않았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론에게 ..
13. 비가 내릴 것 같네.(5,100자) “나왔어” 미엘은 문 앞에 서 있는 세리나를 보며 웃었다. 세리나가 미엘을 보며 팔을 벌린다. 미엘이 세리나의 팔 위로 팔을 걸치며 끌어안았다. 외출하고 온 미엘에게선 은은한 나무냄새가 났다. 아침에 뿌린 향수 향이 날아가면 밖에서 묻어온 향인 건지 체향인지 모를 향이 섞여서 났다. 더운 여름, 세리나에게선 산뜻한 향이 났다. 미엘은 세리나를 강하게 한 번 끌어안고 놓아준다. “오늘은 좀 늦었네요” “많이 기다렸어?” 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엘이 빙긋 웃으며 세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 며칠 저택에 돌아오는 시간이면 세리나가 나와 미엘을 반겼다. 싫은 기분은 아니라 거부하지 않았지만 나가는 날이면 꼬박꼬박 나와서 반겨주는 게 어떻게 알고 나오는지, 하루 종일 밖에만 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때그..
12. 고민과 편안한 밤 (5,212자) 얕은 마력으로 꽁꽁 둘러싼 미엘은 도시로 나왔다. 누구도 미엘을 알아보지 못했다. 흐릿한 인상으로 기억되지도 않을 껍데기를 만들어 뒤집어쓰고는 많은 인파 속을 걷는다. 스스로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수도에 자주 나오면서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미엘은 많은 시간을 방황하며 보냈다. 성인식이 지난 지도 두 세기가 지났다. 미엘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미엘은 얕은 마력 껍데기에 자신을 감추고 또 감췄다. 벨라에게 마력을 주고 거리에 나오면 항상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경험이란 평범한 사람이라면 겪어보지 못할 종류였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땐 알 수 없었던 시선이다. 우습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을 ..
11. 도망친 곳 (5,717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마탑을 대상으로 시위하기 시작했다. 마법사와 비마법사 사이의 갈등으로 일이 불거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마탑을 신뢰하지 못했고, 마법사를 혐오했다. 마법으로 굴러가는 세계에서 마법사는 꼭 필요한 존재라 정치적으로 꼬이고, 꼬여 논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일이 이렇게 번질 때까지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은 황궁까지 불만의 목소리가 닿았다. 시위가 커져 쿠데타로 변질할 위협을 느낀 황궁은 미엘을 내쫓기로 공표했다. 사람들은 미엘을 죽이기를 원했다. 마법사의 죽음은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원해야 가능했고, 죽음을 보조해줄 마법사들이 셋은 붙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마법사의 죽음으로 닥치는 피해가 컸다. 보조 마법사들이 결계를 치지 않는다면 마법사의 심장에서 터져 나온 마력이 주변 존재의..
10. 어렸던 시절 (5,214자) 미엘은 사람이고 싶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평범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마법사는 신이 버리고 간 불량품이었다. 인간이지도, 마물이지도 못했다. 인간이라기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물이라기엔 사람과 너무도 흡사한 닮아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람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과 다른 베타성을 띄는 존재만이 끊임없이 나도 같다고, 다르지 않다고 설명해야 한다. 미엘은 일반적으로 평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였으므로 사람임을 설명해야 했다. 나도 살아있다고. 살아간다고. 미엘의 부모는 갓 태어난, 울지 않는 미엘을 보고 숨을 멎었다. 양수에 불어있는 아기에 비해 뚜렷하고 깔끔한 이목구비도 한몫했지만 미엘은 눈을 깜빡이며 울지 않았다. 깜빡깜빡. 표정이라는 게 얼굴에 뜨..
09. 가끔은 유치해도 (3,224자) 세리나가 미엘의 집에서 머물게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미엘은 일주일에 두세 번 외출하는 듯했다. 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있어서 이대로 살아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변하지 않고 재미없는 하루들의 반복이었다. 아침이면 미엘과 밥을 먹었고 혼자 산책했다.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세리나의 일과 전부였다. 미엘과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서로 할 말이 없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가 끝이었다. 둘 사이에 큰 관계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통성명하지 않았던 사이에서 이름을 아는 사이가 되었을 뿐이었다. 소녀는 저택에서 지내면서 고민했다.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삶이 싫지는 않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사랑을 알려주겠다 했지만, 이 흐릿한 감정을 어떻게 알..
08. 너 이름은 뭐니? (4,408자) 여자는 소녀가 지내는 방을 빠져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도착한 주방은 음식냄새가 가득했다. 입맛을 돋구는 음식 냄새에 토기가 일었다. 여자는 주방에 딸린 뒷문을 벌컥 열었다.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는 통을 열고 토를 쏟아낸다. 목이 걸걸했다. 맑은 침이 입가 주위로 떨어져 내려 헛웃음을 짓는다. 감정을 거래한 계약의 끝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은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존재지.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살아가고, 행복에 겨워 죽어버리기도 하니까.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복잡함, 갈망하게 되는 결핍. 사람은 빈 감정이 주는 공허를 견디지 못해 계속해서 어떤 감정으로 하루를 채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뭐지. 웃음이 나왔다. 계약. 말도 안 되는 계약은 신의 장난인가. 사람의 감정을, 사고팔..
07. 계약 (3,663자) 긴 잠에 빠져들었다. 소녀가 눈을 떴을 땐 비가 그친 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에서 눈을 든 소녀는 이틀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찌뿌둥했다. 엄청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졸음이 끝도 없이 잠이 밀려온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인다. 의식이 꺼지기 전 있었던 일을 가늠하듯 깜빡깜빡. 지난 일을 기억해보려는 노력도 잠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었다. 눈을 감고 있다 문득 이대로 잠들면 깨어나지 못할까 겁이 나 눈을 뜬다. 윙윙 울리는 머릿속을 무시하며 천천히 일어난다. “일어났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작은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덮은 여자가 느릿하게 침대 맡으로 걸어왔다. 소녀는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여자를 경..
06. 저랑 계약해요. (4,801자) 소녀는 짐을 싸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소녀의 짐은 처음부터 없어서 떠날 짐도 없었다. 짐 정리가 어렵지 않았다. 여자가 첫날에 챙겨준 세안 도구와 수건,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모두 여자가 내어준 것들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많은 걸 가지고 떠나게 되는 기분은 이상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도 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짐 싸고 책 읽다 방에 오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굳이 사용인이 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켜지고 꺼지는 등불이 신기했다. 마력을 퍼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던 여자가 생각났다. 체력도 마력의 양도 어마어마한 거겠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여자가 생각났다. 떠나지 말라면 떠나지 않을 거냐 말하던 여자의 표정이 구슬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