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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도망친 곳 (5,717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마탑을 대상으로 시위하기 시작했다. 마법사와 비마법사 사이의 갈등으로 일이 불거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마탑을 신뢰하지 못했고, 마법사를 혐오했다. 마법으로 굴러가는 세계에서 마법사는 꼭 필요한 존재라 정치적으로 꼬이고, 꼬여 논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일이 이렇게 번질 때까지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은 황궁까지 불만의 목소리가 닿았다. 시위가 커져 쿠데타로 변질할 위협을 느낀 황궁은 미엘을 내쫓기로 공표했다. 사람들은 미엘을 죽이기를 원했다. 마법사의 죽음은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원해야 가능했고, 죽음을 보조해줄 마법사들이 셋은 붙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마법사의 죽음으로 닥치는 피해가 컸다. 보조 마법사들이 결계를 치지 않는다면 마법사의 심장에서 터져 나온 마력이 주변 존재의..
10. 어렸던 시절 (5,214자) 미엘은 사람이고 싶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평범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마법사는 신이 버리고 간 불량품이었다. 인간이지도, 마물이지도 못했다. 인간이라기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물이라기엔 사람과 너무도 흡사한 닮아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람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과 다른 베타성을 띄는 존재만이 끊임없이 나도 같다고, 다르지 않다고 설명해야 한다. 미엘은 일반적으로 평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였으므로 사람임을 설명해야 했다. 나도 살아있다고. 살아간다고. 미엘의 부모는 갓 태어난, 울지 않는 미엘을 보고 숨을 멎었다. 양수에 불어있는 아기에 비해 뚜렷하고 깔끔한 이목구비도 한몫했지만 미엘은 눈을 깜빡이며 울지 않았다. 깜빡깜빡. 표정이라는 게 얼굴에 뜨..
09. 가끔은 유치해도 (3,224자) 세리나가 미엘의 집에서 머물게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미엘은 일주일에 두세 번 외출하는 듯했다. 세리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있어서 이대로 살아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다. 변하지 않고 재미없는 하루들의 반복이었다. 아침이면 미엘과 밥을 먹었고 혼자 산책했다.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세리나의 일과 전부였다. 미엘과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서로 할 말이 없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가 끝이었다. 둘 사이에 큰 관계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통성명하지 않았던 사이에서 이름을 아는 사이가 되었을 뿐이었다. 소녀는 저택에서 지내면서 고민했다.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지내는 삶이 싫지는 않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사랑을 알려주겠다 했지만, 이 흐릿한 감정을 어떻게 알..
08. 너 이름은 뭐니? (4,408자) 여자는 소녀가 지내는 방을 빠져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도착한 주방은 음식냄새가 가득했다. 입맛을 돋구는 음식 냄새에 토기가 일었다. 여자는 주방에 딸린 뒷문을 벌컥 열었다.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는 통을 열고 토를 쏟아낸다. 목이 걸걸했다. 맑은 침이 입가 주위로 떨어져 내려 헛웃음을 짓는다. 감정을 거래한 계약의 끝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은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존재지.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살아가고, 행복에 겨워 죽어버리기도 하니까.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복잡함, 갈망하게 되는 결핍. 사람은 빈 감정이 주는 공허를 견디지 못해 계속해서 어떤 감정으로 하루를 채운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뭐지. 웃음이 나왔다. 계약. 말도 안 되는 계약은 신의 장난인가. 사람의 감정을, 사고팔..
07. 계약 (3,663자) 긴 잠에 빠져들었다. 소녀가 눈을 떴을 땐 비가 그친 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에서 눈을 든 소녀는 이틀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찌뿌둥했다. 엄청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졸음이 끝도 없이 잠이 밀려온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인다. 의식이 꺼지기 전 있었던 일을 가늠하듯 깜빡깜빡. 지난 일을 기억해보려는 노력도 잠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잠들고 싶었다. 눈을 감고 있다 문득 이대로 잠들면 깨어나지 못할까 겁이 나 눈을 뜬다. 윙윙 울리는 머릿속을 무시하며 천천히 일어난다. “일어났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작은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덮은 여자가 느릿하게 침대 맡으로 걸어왔다. 소녀는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여자를 경..
06. 저랑 계약해요. (4,801자) 소녀는 짐을 싸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소녀의 짐은 처음부터 없어서 떠날 짐도 없었다. 짐 정리가 어렵지 않았다. 여자가 첫날에 챙겨준 세안 도구와 수건,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모두 여자가 내어준 것들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많은 걸 가지고 떠나게 되는 기분은 이상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도 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짐 싸고 책 읽다 방에 오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굳이 사용인이 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켜지고 꺼지는 등불이 신기했다. 마력을 퍼부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던 여자가 생각났다. 체력도 마력의 양도 어마어마한 거겠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여자가 생각났다. 떠나지 말라면 떠나지 않을 거냐 말하던 여자의 표정이 구슬퍼 ..
05. 저한테 왜 잘해주셨어요? (3,600자) 날이 밝아왔다. 소녀는 새벽에 봤던 여자의 표정이 떠올라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면서 식당으로 내려가 본 여자는 여전했다.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소녀를 맞았으며 소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음식의 맛 또한 변함없이 훌륭했다. 대화는 없었다. 둘 사이에는 공통된 대화 소재가 없었다. 간단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저택을 나섰다. 오늘도 소녀는 서재로 향했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을 무렵 소녀는 책을 얼굴에 덮었다. 눈을 감았다. 마을에서는 살기 위해서 살았다. 먹고, 자고, 그저 생을 연명하는 데 집중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은 지키지 않으면 다 사라져버릴 것들이었다. 이 저택에 온 이후론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았다. 하루가 평안했음을 안도하지 않아도 됐다. 하..
04. 나의 이유 (4,500자) 여자는 생각했다. 이 넓은 저택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눈을 감으면 밤이었고, 뜨면 아침이었다. 시간을 세지 않은 이후로는 하루하루에 계절이 바뀌었다. 어느덧 여자는 마지막을 생각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생일을 지나오면서 남은 건 공허였다. 내가 올해 몇 살이지? 매년 같은 날 다락방의 종소리가 울렸다. 생일이었다. 커다란 저택에 사람은 여자 혼자뿐이었다. 커다란 저택을 관리하기 위해 할 일은 많았지만 하나하나 다 챙길 필요는 없어서 마력으로 해결하거나 포기하다 보니 할 일이 없었다. 여자가 하는 일은 가끔 산책하기, 가끔 걷기, 가끔 책 읽기. 의미 없이 가끔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가끔이라는 단어는 이상했다.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날. 그렇지만 까먹지는 않을만한 기간. 가끔, 가..
03. 당신의 존재 (공포 6,748자) 03 햇빛이 눈꺼풀 위에 내려 천천히 눈을 떴다. 몇 시일까. 해가 뜰 무렵에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이 떠졌다. 중간에 깨지 않고 늦잠을 자본 게 얼마 만인지. 기분 좋은 이불이랑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으로 일어났다. 발바닥에 푹신한 카펫이 닿는다.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나가니 맛있는 냄새가 났다. 소녀는 허기진 배를 안고 1층으로 내려간다. 주위를 한 번 둘러봤다. 저택에 사용인이나 다른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다른 점이 없는 저택을 한 번 훑어보며 식당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식탁에 수프를 놓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소녀를 보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일어났니? 깨..
02. 아무것도 묻지 않은 밤(공포 4,221자) 02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소녀를 욕실로 이끌었다. 역시나 넓은 방 하나 크기의 욕실이었다. 한 사람이 쓰기엔 과할 만큼 사치스러운 욕실. 금이 박힌 욕조에 따뜻한 물이 금세 차올랐다. 소녀는 여자가 준 옷과 수건을 옆에 놓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의 흰 발이 물에 잠긴다. 미지근한 공기가 닿았던 피부에 따뜻한 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물에 몸을 푹 숙인다. 욕조 옆으로 물이 흘러넘쳤다. 넓은 욕조에 홀로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천민은 아니었지만, 귀족도 아니었다. 소녀는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자랐고, 가끔은 궁핍해도 배곯은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힘들어지긴 했어도 돌아가시기 전 남겨주고 떠난 것들이 많아 괜찮았다. 마지막 말이 뭐더라. 지금 슬픔은 잠시뿐이야. 소나기 같은 슬픔..